"“아부지!” 이제 그곳엔 답답하고 완고한 비닐이 걷힌, 그리움과 따뜻함이 꽃피어 있는 아버지의 방이 있을 것이다. 난 아버지의 방에 깔린 이불 밑으로 허물없이 발을 묻고 아버지의 손을 잡고 이야기할 것이다. “아부지, 오래오래 건강하게 저희 곁에 계셔 주세요.”"
아버지의 방 - 이주옥
매일 아침 친정어머니와의 통화는 너무나 익숙한 하루 일과다. 안부를 확인하고 미주알고주알 잡담도 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안부는 어머니와의 통화 끝에 습관처럼 묻는 것으로 끝나고 만다. 그날도 어머니와의 일상적인 대화 끝자리에서 건조한 목소리로 여쭸다.
“아부지는요?”
“팔이 쪼까 아퍼서 아까 참에 보건소에 물리치료 받으러 가셨어야.”
“팔이 으찌게 아프시다요?”
“메칠 전 화장실 간다고 일어서다가 한쪽 팔을 방바닥에 짚어 불드만 좀 불편한 갑써.”
“에휴, 조심하시제…….”
그러고 열흘여가 지났다. 모두가 팔이 조금 불편한 것으로만 여겼다.
아버지는 평상시 몸이 조금만 불편해도 누가 권하기 전에 알아서 병원에 가셨다. 그런 아버지를 보고 어머니는 늘 당신 몸을 신주단지 모시듯 한다고 했다. 언젠가 어머니는 조금은 어이없다는 듯 흥분된 목소리로 전화를 하셨다.
“오메 느그 아부지 잔 봐야. 내가 으째 몸이 으실으실 안 좋아서 우황 청심환 한 개 묵을라고 했드만 스무 개가 몽땅 빈 껍질만 있당께.”
누군가에게 선물받은 청심환 한 통을 비타민 드시듯 혼자서 다 드시고 빈 껍질만 쪼르르 담아 놓으셨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우린 아버지 건강에 대해 소홀했는지도 모른다.
그랬던 아버지가 이번에는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던지 보건소만 다녔고 두어 번 한의원에서 침도 맞으셨다. 그러나 열흘이 넘어도 차도가 없자 결국은 읍내 종합병원에 가셨다. X레이 검사 결과 뼈에 금이 가 있어 4주 진단을 받았다.
아버지는 그날 혼자 병원에 가서 혼자 입원 절차를 밟고 깁스를 하셨다. 어머니는 물론, 자식들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동네 식당에서 술을 드시다 핸드폰을 놓고 왔는데, 끝내 찾지 못해서 아버지께는 따로 연락수단이 없었다는 것도 그날 알았다. 하필 그날 어머니는 40여년 만에 연락이 닿은 깨복쟁이 시절의 친구를 만나러 집에서 멀지 않은 친정마을에 가셨다. 아버지의 입원 사실은 까마득하게 모르고 늦은 시간까지 친구와 추억 나누기에 열중이었다고 하셨다. 그 다음 날 그나마 가까이 사는 작은언니가 휭하니 손님처럼 다녀갔고, 엄마는 병원에서 운행하는 셔틀버스를 타고 하루 두 번씩 아버지를 보러 다니셨다. 서울에 있는 자식들이 내려가겠다고 하자 어머니는 손사래를 치며 말리셨다.
“오지 말어야. 팔이 부러진 것도 아니고 금간 것잉께 밥 먹을 때 말고는 불편한 것 하나도 읍는디 뭐.”
말 그대로 금이 간 것일 뿐인데 굳이 4주 동안 입원해 있을 이유가 없는 것 같았다. 아버지 당신이 가장 퇴원하길 바랐다. 병원에선 매일 주사를 맞아야 한다고 쉽게 허락하지 않았지만 성실하게 통원치료를 받겠다는 약속을 하고 일주일 만에 퇴원을 하셨다. 집으로 오신 아버지께 전화를 드렸다. 염치가 없어 목소리도 기어들었다.
“죄송해요. 가보지도 못하고…….”
그러나 아버지는 허허 웃으며 말씀하셨다.
“괜찮다. 별거 아닌디. 근디야, 그 병실 환자 다섯 중에 자식들이 하나도 안 온 사람은 나베끼 없드라. 허허!”
호탕한 웃음 속에 담긴 한마디에 가슴이 뜨끔했다. 말씀은 오지 마라 하시면서도 얼마나 기다렸을까. 한쪽 팔에 깁스를 하고 병실에 혼자 계셨을 아버지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려 눈길 줄 곳을 찾을 수 없었다. 젊은 날의 아버지 모습도 선하게 떠올랐다.
아버지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 네 시면 일어나서 동네 산을 오르셨다. 건강도 중요하지만 한번 정한 것을 어기면 안 된다는 것이 더 큰 이유였다. 아무리 술을 많이 드셔도 비틀거리거나 큰 소리를 내서 가족들을 불편하게 하는 일도 없었다. 그렇게 자신에게 철저한 만큼 딸자식들 단속에도 바늘귀만큼도 틈이 없었다.
가장 친했던 친구가 결혼하던 날 귀가시간이 조금 늦어지자 피로연장까지 찾아오셨다. 남학생을 만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작은언니는 간혹 엎드려뻗쳐에 볼기짝을 맞는 수모도 당하곤 했다. 자매들끼리 옷을 바꿔 입는 것조차도 나무라셨다.
“지 꺼 지가 입어야제. 지 몸뚱이 꿴 거 아무데나 돌리는 벱 아녀!”
언제나 엄하고 단호한 말투와 칼 같은 통제에 비닐봉투를 뒤집어쓴 듯 숨이 막혔다. 그건 어쩌면 일곱 남매 키워 내시느라 자신에게도, 자식들에게도 부드러울 틈이 없고 여유 또한 없었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형제들이 아버지의 방 마루 끝에서 빠끔히 들여다보게만 하는 거리감만 만들어주었다. 결혼하고 집을 떠나올 때, 서운함보다는 아버지 곁에서 떠나온다는 사실에 후련함과 무한한 자유를 느꼈을 정도였으니까.
아버지는 멋쟁이기도 했다. 키가 크고 하얀 얼굴에 눈이 서글서글했던 아버지는 젊은 시절 트렌치코트를 즐겨 입으셨다. 전혀 시골사람 티가 나지 않았다. 언젠가 함께 기차를 타고 고모 댁을 다녀오던 때였다. 기차 안엔 앉을 자리가 있었는데도 아버지는 굳이 코트 자락을 날리며 계단이 있는 난간에 서 계셨다. 어린 눈에도 멋있었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때 아버지는 가슴이 아직 뜨거울 마흔 무렵이었다. 그 후, 우리는 도망치듯 아버지의 곁을 떠났고 제 살기에 세월 가는 줄 몰랐다.
지난여름이었다. 서울에 다니러 오신 아버지와 식사를 하고 나오다 몇 발자국 앞에 걷고 계시는 아버지를 보았다. 앞으로 꼬꾸라질 듯 위태로운 걸음이었다. 조금 오래 걸으시더니 숨소리마저 가빠졌다.
“세상에 우리 아부지가 언제 저렇게…….”
팔순을 넘긴 지 다섯 해, 만년 곧고 짱짱할 줄 알았던 아버지가 물 먹은 흙담처럼 허물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안타까워하는 우리를 보고 어머니는 무심하게 말씀하셨다.
“느그 아부지 연세가 몇이냐? 저만 하면 건강하고 더 바랄 것도 없제.”
그러나 어머니의 목소리도 가늘게 떨고 있었다.
친정 김장하는 날이었다. 12월의 시작과 함께 눈이 내리고 기상청에선 한파를 예보했다. 갈 수는 없고 전화만 했다. 뜻밖에 아버지가 받으셨다.
“아이고 느그 엄마는 나 땀세 그 볕 좋은 날 다 보내고, 하필 이라고 춘 날 짐장한단다. 죙일 마당에서 땡땡 얼어부렀겄다!”
목소리에 걱정이 가득했다. 전혀 낯선 사람의 목소리 같았다. 무심하고 정 없어 보였던 한 남자는, 늙은 아내에게 이제야 마음을 보이고 유순한 눈빛을 보내는 것일까.
그날부터 아버지와의 통화가 조금씩 트였다. 이젠 안부를 묻는 자식들을 한 톤 높은 목소리로 반기신다.
“오냐오냐! 벨일 없쟈? 나도 이제 괜찮어야.”
사방이 날카롭게 각져 있던 한 남자도 언제인지 모르게 둥근 조약돌이 되어 있었던 것을.
막내동생은 아버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동생과 전화하다 보면 울먹이는 동생을 따라 나도 여지없이 눈꼬리를 찍어내곤 한다. 아버지 문병을 핑계 삼아 친정에 가기로 했다. 동생은 기말고사를 며칠 앞둔 중학생 아들이 신경 쓰이지만, 함께 가기로 했다. 이번엔 아무 말 없이 내려갈 것이다. 미리 이야기하면 또 오지 마라 하실 테니.
대문을 들어서며 웃음 반, 눈물 반이 묻은 목소리로 부를 것이다.
“아부지!”
이제 그곳엔 답답하고 완고한 비닐이 걷힌, 그리움과 따뜻함이 꽃피어 있는 아버지의 방이 있을 것이다. 난 아버지의 방에 깔린 이불 밑으로 허물없이 발을 묻고 아버지의 손을 잡고 이야기할 것이다.
“아부지, 오래오래 건강하게 저희 곁에 계셔 주세요.”
이주옥 -----------------------------------------------
전남 보성 출생. 양일문우회 회원.
당선소감
편지를 쓸 때 습관처럼 쓰는 마지막 한 줄이 있습니다.
“우리 늘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거기에 조금 더 아름답게 말예요.”
누구나 고개 끄덕이는 객관적인 행복 앞에, 조금은 피상적인 아름다움까지 얹히면 훨씬 근사한 인생이 되리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조금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마치 주문처럼 ‘아름답게 살자.’를 외며 견뎠습니다. 내게 그 아름다움이 형상화되는 것은 글이었습니다. 거기에 눈물도 적셨고, 분노도 새겼고, 미소도 담았습니다. 그것은 나를 버티게 해 준 짱짱한 버팀목이었고 남루해진 감정과 육신을 헹구는 샘물이었습니다.
지도를 받고 습작을 하는 동안 큰 욕심은 내지 않았습니다. 그저 내 자신 앞에 나를 풀어놓고 나와 마음을 나누는 일에 즐거워했던 것 같습니다.
이제 길을 나서는 빗장은 열렸고 그 길을 걷기 위해 첫발을 뗐습니다. 심호흡 한번 하고 어깨에 멘 바랑을 바짝 조이고 걸어 볼 참입니다. 내가 흔들리고 휘청거릴 때마다 늘 나를 추스르도록 힘이 되어준 내 곁의 사람들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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