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나무.... 여러분, 먼나무가 무엇인지, 작가가 여러분들과 소통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시지 않으시렵니까?
겨울 기다리는 나무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더니 한 그루의 나무가 떠난 자리는
마치 고독의 공간처럼 다가선다.
새로 집을 짓고 이사 오면서 앞마당에 조경수로 동백, 향나무, 대추나
무를 심었다. 동백나무를 심은 곳에서 벌써 말라죽고 떠나간 나무가 세
그루째이다. 처음에는 동백나무를, 다음은 감나무, 그리고 상록침엽수
인 구상나무를 심었다. 한데 모두 다 3년을 버티지 못하고 끝내 푸른
영혼을 반납하고 말았다.
공사를 하면서 휘발성 기름이나 찌꺼기를 버렸던 곳이다. 나무를 심
을 때부터 의심쩍어 흙을 파내고 나무를 심었다. 그런데도 10년 사이
에 오염의 아픔을 황폐한 생명의 조각을 통해 그 심산을 드러내 보인
것이다.
이번에는 주변에 있는 흙을 깊게 파내고 먼나무를 심었다. 제주와 보
길도에 주로 자생하는 빨간 열매가 달리는 나무이다. 요즘은 가로수로
도 많이 심었지만 내가 조경수로 심을 때는 그리 흔치 않았다.
제법 봄기운이 무르익은 어느 날이었다. 아무렇게나 버려진 화분에
파란 싹이 소복이 돋아나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지난봄에 돋아난 것인
데 미처 발견하지 못한 먼나무의 어린 싹이었다. 뿌리가 다치지 않게
조심스레 뽑아내어 화분에 옮겨 심었다. 일 년이 지나자 몰라보게 자라
났다. 더 많은 묘목이 있으면 고향집 울타리 조경수로 심을 요량으로
가을에 잘 익은 열매를 따서 큰 화분 두 개에 씨앗을 묻었다.
새봄이 오고 여름이 지나가도 싹은 보이지 않았다. 이게 어찌된 일인
가. 궁금증에 흙을 파보았다. 씨앗을 묻은 흔적도 없다. 씨앗이 땅에 떨
어져 생명을 얻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나 먼나무는 그 이치도
저버리고 기다림은 결국 무위의 시간이 되었다.
생명의 예지叡智가 씨알 속에 숨어 있음을 간과한 나의 소치가 낳은
결과였다. 사실 먼나무 열매가 새싹을 얻으려면 새의 뱃속에서 따스한
숙성과정을 거쳐 배설된 것이라야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미처
시간도 깨닫지 못한 가탈이 되고 말았다.
올가을에도 빨간 열매가 흐드러지게 달렸다. 새들이 날아와 이 가지
저 가지를 넘나들며 조잘댄다. ‘아마 열매를 따 먹으려 왔겠지.’ 하고 쳐
다 보았다. 새들은 열매를 따 먹지 않고 고개만 갸웃거리다 그냥 날아가
버렸다. 열매를 구경만 하고 떠나가는 새들이 의심스러워 잘 익은 열매
를 따서 맛을 보았다.
입에 넣자 ‘퇴-퇴’ 하고 얼른 뱉어 내었다. 쓸개보다 더 쓴맛이 팥알
만 한 열매 속에 숨어있을 줄이야. 새들이 조잘대며 눈여겨보다 날아가
버린 연유를 알 것 같았다. 종이 위에 열매를 문질러 보았다. 겉으로
드러낸 진홍빛과는 달리 속내는 쓰디쓴 쑥색의 비애가 들어 있었다. 그
런가하면 5~6개의 씨도 다른 열매의 씨와는 달랐다. 대개 씨앗들은 원형
이거나 타원을 이룬다. 하지만 먼나무는 씨앗은 양끝이 뾰족하여 새들
이 그대로 배설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생존을 위한 전략
이고 종족보존을 위한 슬기였다.
겨울이면 먼나무에게서 나는 가끔 아침의 위안을 받는다. 모든 열매
는 가을이면 갈무리되지만 먼나무는 겨울을 기다린다. 그리고 새를 유
혹한다.
밤새 눈 내리던 어느 날, 창문을 열었다. 기다렸다는 뜻 찬 공기가
한꺼번에 달려든다. 산뜻한 아침을 불러들인다. 창은 언제나 삶을 관조
할 마음의 여유를 얻는다. 그리고 풍경을 읽는다. 흰 눈 사이로 살며시
고개를 내민 빨간 열매가 더없이 앙증맞게 보인다. 덩달아 햇살도 가세
한다. 동심의 하얀 눈과 기다림에 달관한 빨간 열매, 그리고 진초록 잎
새가 한데 어우러져 한나절 풍광을 만들어 낸다.
오늘같이 온 천지가 눈 덮인 날은 어김없이 새들이 날아온다. 허기
진 아침을 달래기 위해서이다. 마당은 분주한 장터가 된다. ‘사랑의
열매’보다 더 훈훈한 인정이 넘쳐난다. 마당 안 정경을 보고 있노라면
정겨운 서정을 담아내고픈 마음이 저절로 돋아난다. 하지만 느낌을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이 말처럼 그리 쉽지 않다. 이것저것 적어보지만
시원치 않다. 그중에서 하나 건진 것이라면 하얀 겨울을 달래는 새들
과 나무의 대화이다. ‘살기 위해 쓴맛을 삼키고, 무한히 살고 싶어 겨울
을 기다린다고…….’
모든 나무는 봄을 기다린다.
하지만 먼나무는 겨울을 기다린다. 남을 위하는 길, 그것이 나를 위하
는 길임을 일찌감치 깨달은 먼나무에게서 봄을 기다리는 내 손끝에 묻
어나는 빨간 부끄러움을 들여다본다.
작가메모 ---------------------------------------------------
<겨울 기다리는 나무>는 나의 대표작이라기보다는 두 번째 수필집 표제
로 쓰였던 작품이라는 데 의미를 두고 싶다. 이 말은 뚜렷이 내세울 만한
대표작이 없다는 말과도 상통한다.
먼나무는 겨울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겨울을 통해, 아직 태어나지 않는
생명을 꿈꾸는 나무이다. 기다림의 영혼을 빨간색으로 승화시켜 놓았다.
우리들의 삶 속에 때로는 체감 못하는 자연의 묵시가 있음을 먼나무를
통해서 관조해 보고 싶었다.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그 절반은 흙에 있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싶은 마음을 그려본 것이다. 나도 어쩌면 ‘겨울 기다리는 나무’인지도 모
른다.
정윤택 ------------------------------------------------------------------------
1998년 ≪수필과비평≫ 등단.
2008년 ≪대한문학≫ 시 신인상.
제주문인협회 회원. 제주수필문학회 회장.
수필집: ≪산처럼 살고 싶었네≫, ≪겨울 기다리는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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