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행사에 나도 차츰 참석을 하기로 했다. 법원 판결은 판결인 것이고. 그가 드리우는 짙은 그늘이 어쩌면 아마 진짜 사랑이더라는 것을. 그렇게 겨울이 가고 봄을 지나서 지금은 여름의 절정이다."
울고 난 후의 점심 / 변애선
술에 취해 연일 늦게 들어갔더니 하필 그 추운 겨울 날,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비밀번호도 키도 소용이 없었다. 안으로 들어갈 어떤 방법도 없었다. 날더러 얼어 죽으라는 말이냐, 분에 떨며 전화를 해도 절대 받지 않았다. 그 길로 차를 몰았다. 새벽 즈음에 웅크린 채 잠이 들었다.
다음 날은 그 문이 열리더라. 곧장 포장이사를 불러서 나의 물건들을 챙겨서 출발하는 데 딱 한 시간이 걸렸다. 그 짐을 부려둔 채 그냥 살았다. 짐을 풀어서 재배열하는 일은 힘들었고 시간이 오래 걸렸다. 혼자 결정하고 혼자 견뎌야 하는 일이었지만 겨울이니까 정말 추웠다. 어둠을 가르는 바람 소리가 사람을 미치게 만들 지경이었으니. 봄까지 조금만 더 기다릴 것을.
완전히 헤어진 다음에야 담담하게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리 합의를 하더라도 반드시 두 사람이 법원에 함께 가야만 서류가 접수된다고 하니 그 사람을 만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가정법원 앞마당에는 꽃눈을 숨긴 채 겨울나무가 몸을 떨고 있었다. 일층 민원실 옆에서 접수를 하고 출두일이 적힌 작은 쪽지를 받으니 그것으로 끝이었다. 미성년 자녀가 없는 경우이니 한 달 후에 출두하여 본인 의사를 재확인하면 끝난다는 것이다. 너무 간단해서 어이가 없고 화가 날 지경이었다. 이렇게 끝날 것을. 그리도 오래 얼마나 망설이고 주저했던가.
그때, 절대로 싫다고 했어야 했다. 삼 분도 채 걸리지 않는 서류 접수를 마치고 서로 등을 돌린 채 딱 헤어져야 했었다. 데려다 준다고 하기에 그 차를 얻어 탔는데, 아리아인지 무슨 오페라 음악이 흐르는데 참기가 어려웠다.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음악이란 왜 사람 마음을 그토록 휘저어 놓고야 마는 것인지. 절대로 울지 않겠다고 얼마나 마음을 단단히 붙들고 나갔는데.
겨우 진정이 될 무렵에 그가 물었다, 점심을 먹고 들어갈 텐가. 웃음이 나왔다. 우리가 지금 마주보고 밥을 먹어야 하나. 웃고 나니 배가 고팠다. 근사한 식당에 가서 밥을 먹었다, 담담하게 일상을 이야기하면서. 헤어진다는 사실이 맞나. 다정하게 밥을 먹자니 그다음에 덮쳐 올 생의 무게는 나도 모르겠더라.
살면서 나는 늘 바쁘다는 핑계로 그 사람이 알아서 사다 주는 것을 입고 살았는데, 쇼핑을 하자고 하였다. 내 돈 주고는 감히 사지 못할 옷을 찬찬하게 고를 수 있었다. 그는 착하고 순하게 기다렸다. 그런 적이 언제 있었나. 늘 투덜거리고 서로 불만을 토로했었는데. 그리고 그는 나를 데려다 주고 떠났다.
그 쇼핑백을 던져 놓았다.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너무 오랜 세월을 그 사람을 의식하고 살았으니 멍하고 황당했다. 그가 사라진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당황스럽기만 했다. 그래도 짐은 차츰 풀어야 했다. 짐을 정돈하면 할수록 그 어느 한 가지도 그 사람의 기억이 배이지 않은 것이 없었다. 과거가 배인 물건들을 버리고 나면 남아날 것이 없었다.
결국 가족 행사에 나도 차츰 참석을 하기로 했다. 법원 판결은 판결인 것이고. 그가 드리우는 짙은 그늘이 어쩌면 아마 진짜 사랑이더라는 것을. 그렇게 겨울이 가고 봄을 지나서 지금은 여름의 절정이다.
변애선 ------------------------------------------------
변애선님은 수필가, 《에세이스트》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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