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좋은수필/좋은수필 본문

[좋은수필 2013년 11월호, 신작수필 14인선] 바다 안개海雲 - 이미연

신아미디어 2014. 7. 22. 08:40

"손바닥 안에서 바다 안개를 담은 영상이 세상의 먼지를 내게 맡기라고 청한다. 신라 말 최치원崔致遠이 난세를 피하다가 이곳에 이르러 그 절경에 붙인 이름이 왜 바다안개海雲 인지, 즉 그 안개의 풍광을  나는 오늘 제대로 만나게 된 것이다. 그곳에 서서 저 바다〔太平洋〕를 바라본다. 안개를 지금 막 올려 보낸 바다가 내게 말한다. 그냥 파도에 그러니까 세파世波에 몸을 맡겨보라고."

 

 

 

 

 

 

 바다 안개海雲       /  이미연

 

   지루한 장마가 한 달 넘게 이어지고 있다. 딸아이가 갑자기 바다가 보고 싶다고 말한다. 나는 망설인다. 머뭇거린다. 왜 바다가 보고 싶을까? 남쪽에는 폭염이라는데, 구름이 가린 해를 찾아 굳이 먼 길을 떠나려는 것일까? 비가 내리고 또 내리는 서울거리를 거닐면서 이글거리는 태양과 바다를 보고 싶은 것일까? 
   아이는 직장을 가진 후 첫 휴가를 얻는다. 남편은 이런 와중에 미국으로 출장을 가게 된다. 이번 여행의 진행은 특별히 더 가고 싶어한 딸아이가 하기로 한다. 구체적으로 휴가 계획을 짜기 시작하려고 보니, 피크타임이고 한동안 피서를 가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목적지는 남들이 많이 간다는 부산으로 정한다. 숙박할 호텔과 기차표도 예매한다.
   우리는 기차를 탄다. 부산역을 걸어 나오면서 아이의 표정은 여행에 대한 기대와 우려를 보이는 딱히 편안한 표정은 아니다. 재빨리 해운대에 위치한 호텔로 향한다.
   새벽에 눈을 뜨고 보니, 바깥은 아직 고요하다. 쿠폰 하나 들고 일 층으로 가서, 6시에 시작하는 뷔페식당의 첫 번째 손님이 된다. 창밖 자전거 타는 사람, 강아지와 산책하는 사람, 아침 운동으로 해변을 뛰는 사람들 틈으로 우리는 들어가서 하나의 풍경을 만든다.
   해변 산책로를 벗어나 모래사장을 거닐면서 바닷가로 향한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는 보이지 않는다. 간밤의 안개는 무거웠는지 아직도 바다 위 제자리에 있다. 이쪽 해변에서 동백섬 쪽으로 신발을 벗고 걷기 시작한다.
   파라솔들을 설치하는 상인들의 분주한 손놀림이 바쁘다. 그렇게 파란색, 빨간색, 노란색 파라솔들이 군대처럼 색깔별로 정렬되고 있다. 쓰레기들을 다 치운 백사장은 걷기에 한결 편하다. 백사장에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면서 말없이 파도소리를 듣는다. 아이는 그 파도소리와 바다의 안개를 손안의 스마트폰으로 담고 있다.
   그때쯤인가 햇살이 나오면서 안개가 눈앞에서 걷혀 하늘로 올라가고 있다. 회색빛 안개가 걷히면서 푸른 바다와 녹색의 달맞이 고개와 파란 하늘이 그 베일을 벗어 올린다. 그래도 파도소리는 크게 들리는데, 눈앞의 풍경이 변하고 있다. 짧은 탄성이 들어가는 동영상 몇 편이 아이 손에 있는 스마트폰에 저장된다. “바다가 보고 싶을 때 봐라.” 내가 나지막이 말한다. “그럴게.” 아이가 말한다. 우리는 임무를 완수한 요원처럼 자리를 일어난다.
   한참이 지나고, 수영이 허락된 시간이 되자 아이는 바닷속에 풍덩 몸을 담그더니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파도를 탄다. 부서지는 물살보다 더 환하게 웃는 아이의 얼굴이 보인다. 점프를 하고, 파도에 몸을 맡기고 수영하기에는 파도가 사나운 바다의 상태를 살짝 눈을 흘기면서 첨벙첨벙 뛰어다닌다.
   “얼마 만에 내가 바다에 왔지?” 아이가 묻는다. “글쎄 생각해보니 십 년이 훌쩍 넘었네.”라고 내가 답한다. “그래, 다음에 또 오자.” 아이가 말한다. “엄마, 바다에 들어가니 몸이 깨어나는 것 같아.” 아이가 말한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가. 안개 속이었던가 보다. “그래, 너 바다 좋아했잖아. 오자니까 왜 싫다고 했니?” 내가 묻는다. “그랬지, 내가 바다를 좋아했었지. 이제는 잠깐잠깐 휴식을 취하고 싶어.” 아이가 말한다.
   나보다 더 키가 큰 딸아이와 나는 바닷가를 걷기 시작한다. 뿌옇고 시커먼 하늘을 마주보고 걷노라니 발밑에 젖은 모래와 바닷물이 발가락을 간질이고 있다. 호텔로 들어온다. 어릴 때 딸아이의 성격처럼 활달하고 거침없는 빨강머리 소녀 앤이 장만하던 티타임을 우리도 갖자고 한다.
   티 팟에 담겨진 얼 그레이와 갈색 설탕 레몬조각과 그것을 담는 작고 앙증맞은 접시까지 다 예쁘게 모여 있다. 조용하게 깔리는 실내악의 선율까지 있어서인가, 웃음 띤 얼굴로 재잘재잘 얘기하는 아이의 모습에서 내가 좋아하던 초등학교 때의 아이의 얼굴을 찾을 수 있다. 나도 웃는다. 그리고 맘속에 담아두었던 이야기가 나온다. 마음의 밑바닥에 감추었던 생각들이 이야기가 되어 졸졸졸 시냇물 소리를 내면서 흘러내리고 있다. 물이 흘러내리면서 감정의 응어리들도 풀리는 듯싶다. 이십대인 딸은 학업과 취업이란 긴 길을 힘겹게 걸어 온 것이다. 어렵게 들어간 직장의 첫 휴가를 받아 온 지금 인생이란 바다에 안개가 걷힌 것인가. 어느새 티타임이 끝나가면서 딸아이는 이제 어른이 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내게는 좋은 친구이며, 동료가 되고 있다.
   그때 손바닥 안에서 바다 안개를 담은 영상이 세상의 먼지를 내게 맡기라고 청한다. 신라 말 최치원崔致遠이 난세를 피하다가 이곳에 이르러 그 절경에 붙인 이름이 왜 바다안개海雲 인지, 즉 그 안개의 풍광을  나는 오늘 제대로 만나게 된 것이다.
   그곳에 서서 저 바다〔太平洋〕를 바라본다. 안개를 지금 막 올려 보낸 바다가 내게 말한다. 그냥 파도에 그러니까 세파世波에 몸을 맡겨보라고.

 

 

이미연  ------------------------------------------------

   이미연님은 수필가, 《계간수필》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