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의 차이나 인생 내력이 달라서 자기도취와 열등감, 우월감과 무모한 자신감, 편협한 생각이 모두에게 고루 분포되어 있는데 자신이 고백하여 때를 밀어내는 쾌재를 보는 일이 우리의 목표다. 자신의 때를 보고 문제 삼는 사람과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를 극복하는 일은 난제다. 우리는 내 숨 네가 마시고 네 숨 내가 마신 사이다. 내 때 녹아 네가 보고, 네 때 녹아 내가 본 사이다. 시작할 때 사진이나 한 장씩 찍어둘 걸 그랬다. 영혼의 반영이 얼굴인데 흔적이나 남길 걸 그랬다."
때 미는 여자 / 오정순
“어머니, 그분이 때밀이도 했대요. 그 일로 돈을 벌어서 빚을 갚고 삶을 일구어냈다네요.”
오랜만에 만나 며느리와 대화하던 중에 ‘때’라는 단어가 깨알 씹히듯 한다.
사람에게 때가 생기지 않았다면 건강한 몸 외에 아무 재능도 없는 그녀가 무슨 수로 그 많은 빚을 갚고 오늘에 이르렀을까를 생각하니 그녀에게 때는 손끝에 밀리는 돈이었다. 누구는 때를 밀어 돈을 벌고 나는 때를 밀어 재미를 보는 여자다.
특별한 액체를 분사하고 나서 레인지 후드의 때를 말끔하게 닦아낸 날은 매직 쇼를 본 것 같았다. 너무나 속이 시원해서 자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한번 ‘때’라는 단어에 꽂히다가 보니 도처에서 때가 말을 건다. 곳곳에서 벗겨달라고 내 의식을 흔들어댄다. 심지어 전철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본 역사의 바닥에서도 묵은 때가 보인다. 무심결에 ‘손이 덜 가면 저렇게 되는구나.’를 보여주고 있다. 보이는 때를 통해 세월을 보았으니 내 인생의 때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결혼하고부터 10년에 한 번 정도는 대대적으로 삶의 때를 밀어보았다. 그때마다 지독하게 마음고생을 하기는 했지만, 영혼의 맑음과 개운함은 무엇에 비길 바가 아니다. 그 맛을 누리다가 보면 어느새 다시 밀어야 할 때에 이른다. 더께가 느껴진다.
올해 시니어 카드를 받은 나는 때 밀기의 일환으로 ‘의미 있는 밥 먹기’를 시작했다. 마음에 서운함이 묻어 있는 인연, 미안함이 남아 있는 사람, 고마움을 전하지 못한 사람 등을 생각하다가 만나지는 대로 밥을 먹자고 청하여 진행 중이다. 지난해에 그렇게 하고 ‘노인’이란 호칭을 받아야 했는데 늦었다.
그와 동시에 1년 동안 영혼의 때를 벗겨보자고 마음먹은 사람들과 함께 집단 워크숍을 시작하였다. 매일 《성서》를 읽고 묵상을 나누고 기도를 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작업이다. 세상의 영화를 덧입는 작업이 아니라 벗겨내는 작업이다. ‘은총’에 불려 ‘기도’를 타올 삼아 때를 민다. 살금살금 반복하여 밀다가 확실히 때 낀 자리다 싶으면 박박 민다. 내가 나를 밀어야지 남이 밀어준다고 들이밀면 순간 거부하게 된다. 본능적 방어다. ‘거기’ 정도로 사인만 주어도 좋으련만 확실히 보이면 여지없이 때를 지적하기도 한다.
공교롭게도 우리는 남의 때는 잘 보면서 자기의 때는 잘 못 보는 것 같다. 수차례 반복해본 사람은 어디에 때가 잘 끼는지를 알고 있으나 때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누가 정성껏 때를 미는지 나는 모른다. 종종 남의 때가 보인다고 지적했다가 화를 돋우는 일도 벌어진다. ‘어머 그래 여기?’하고 때 수건을 가지고 밀러가듯 수긍하는 사람은 드물다.
똥 묻은 사람이 겨 묻은 사람보고 웃듯이 자신을 보고 울어야 할 사람들이 남을 보고 웃는다. 너나 할 것 없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나는 누군가의 때가 보이면 저 때가 내 때려니 한다. 수차례 나를 들여다보면서 알아버렸다. 누구나 속을 뒤지지 않아도 악습이나 약점을 보이며 살고 있다. 자신만 가린다고 생각할 따름이다. 알고 보면 그만큼 사람들이 너그럽다.
화끈거리다가 개운해지는 것을 맛보며 어언 280일이 지났다. 변화라면 감각이 살아나서 웃을 일도 늘고, 티격태격도 늘었다. 그러나 목욕탕 맛이 들려 밤이 길게 느껴지는 증세가 보인다. 어떤 일보다 그 시간이 좋다.
깨끗한 옷이 더 잘 더러워지고 때를 밀고 사는 사람들이 더 잘 때를 본다. 하지만, 조금씩 씻기어 나가면서 내공이 쌓여가는 것을 본다. 서로가 인간적으로 연민을 느끼기도 하고 개성이 파악되면 배려하기도 한다. 사랑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말은 상대방을 모른다는 말이다.
그동안 다들 등의 때를 보일 자신이 없어서 말을 하지 않았지만 볼 눈 있는 사람은 웬만치 봐두었다. 남에게 인생의 등을 보여야만 등을 보는 것이 아니다. 놀라서 뒤를 돌아보는 순간에도 보게 되고, 땅에 떨어진 볼펜을 집을 때도 보게 되듯, 우리는 수시로 자기 인생을 보여주며 살기 때문에 자신만 의식하지 못하는 거다.
환경의 차이나 인생 내력이 달라서 자기도취와 열등감, 우월감과 무모한 자신감, 편협한 생각이 모두에게 고루 분포되어 있는데 자신이 고백하여 때를 밀어내는 쾌재를 보는 일이 우리의 목표다. 자신의 때를 보고 문제 삼는 사람과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를 극복하는 일은 난제다. 우리는 내 숨 네가 마시고 네 숨 내가 마신 사이다. 내 때 녹아 네가 보고, 네 때 녹아 내가 본 사이다. 시작할 때 사진이나 한 장씩 찍어둘 걸 그랬다. 영혼의 반영이 얼굴인데 흔적이나 남길 걸 그랬다.
오늘도 나는 어김없이 ‘어울림방’으로 향한다. 혹한의 날도, 혹서의 날도 갔다. 이제 바람이 부는데 나의 묵주에도 세월이 들어 있다. 반질거린다.
오정순 ---------------------------------------------------
오정순님은 수필가, 《현대수필》로 등단. 저서 《그림자가 긴 편지》, 《도둑숨》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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