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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 2013년 11월호, 신작수필14인선] 감 이야기 - 최매희

신아미디어 2014. 7. 30. 18:31

"감나무가 화가 난 걸까? 해거리 없이 잘 열리던 감이 금년엔 다 빠져버리고 몇 개만 남아 있다. 너무 더운 여름 탓이겠지."

 

 

 

 

 

 감 이야기        /  최매희

 

   우리 집 창밖에는 감나무가 그림처럼 서 있다.
   남편은 유독 감을 좋아하는 터라 이사 오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이 종자가 좋은 감나무 두 그루와 소나무를 심었고 올해로 17년이 지났다.

 

   우리 시댁에는 세 그루의 감나무가 100년을 넘게 집 뒤꼍에 떡 버티고 서 있었다. 어머니는 해마다 감나무 주위에 구덩이를 파고 인분을 몇 바가지씩 부어 놓는다. 그렇게 자란 감은 상품가치를 최고로 치는 대봉으로 단맛이 일품이다. 먹을 것이 없던 배고픈 시절 그 감나무는 최고의 간식 겸 식량의 보고였다.
   결혼 후 서울살이 하면서 해마다 늦가을이면 감을 추수하러 고향집에 갔다. 고목임에도 어찌나 많이 열리는지 열 접은 족히 된다. 남편은 장대를 걸쳐놓고 나무 위를 마치 원숭이 나무 타듯 가볍게 올라가는 폼이 날렵하기 그지없다. 저 나무를 자기 나이만큼 올랐을 터이니 손으로 잡아야 할 가지와 발 디딜 위치를 눈감고도 찾을 것이다.
   나보고는 아래서 받으라고 한다. 따 내리는 감을 스무 개쯤이나 받았을까, 뒷목이 뻣뻣하고 경추가 아프기 시작했다. 스무 개 중 열 개는 놓쳐서 박살이 나버렸다. 남편은 내가 무슨 야구선수라도 되는 줄 아는지 그것도 못 받느냐며 핀잔이다.
   이제 시작인데 위를 쳐다보니 주렁주렁 달린 감이 별무리 같다. 저 많은 감을 언제나 다 따려나 걱정이 앞섰다. 남편도 내가 도움이 안 되겠다 싶은지 포대자루에다 줄을 묶어 올리라고 했다. 자루에다 한 번에 3~40개씩 따서 얌전히 내 발아래에다 내려주면 난 자루를 열어 조심스레 쏟아서 쌓았다. 그러니 하나도 허실이 없고 남편은 그 많은 감을 따면서도 신이 나는 모양이다. 겨우내 두고 먹을 것을 생각하면 즐겁기도 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어쩌면 내가 변비 때문에 감을 안 먹는 게 걱정이 아니라 다행스러워하는 것도 같다.
   그렇게 얼마가 지나자 놀랍게도 그 많던 감이 까치밥 두세 개만 남고 몽땅 내 발 앞에 쌓여 있었다. 어디서 감 따는 올림픽이라도 열린다면 금메달 후보가 분명했다. 그런데 우리 시댁 6남매가 다 감 따는 선수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 어릴 때부터 감나무는 놀이터요, 간식이 가득한 창고 같은 곳이었으니까.
   몇 해 전 뒷동네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큰 길이 나는 바람에 집터가 도로로 편입되어 집과 감나무는  사라져버렸다. 그 후부터는 우리 집 베란다 앞 정원에 심어놓은 감나무를 열심히 가꾸며 산다. 나무는 어느새 3층 높이까지 자라서 대봉을 해마다 150개 이상씩 딴다. 거실 유리문을 열면 손에 잡힐 만큼 가깝다. 가을 단풍이 아름답게 물들고, 서리 두어 번 맞으면 빨간 감만 주렁주렁 열려 자연이 주는 선물에 너무 기쁘고 행복했다.
   작년 일이다. 하루라도 아름다운 풍경을 더 보기 위해 조금 늦게 감을 따려 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외출을 하고 돌아오니 뭔가 허전하고 휑한 기분이었다. 창밖에 탐스런 감이 아래쪽에서 절반은 사라진 것이다. 누구 짓일까? 하고 감나무 밑을 들여다봐도 아무 흔적이 없다. 서리를 해도 낙엽이나 발자국은 있어야 하는데 깨끗했다.
   약이 올랐지만 이미 따간 걸 어쩌랴 싶어 이번 주말에 남은 것이나마 따기로 마음먹었다. 주말이 삼 일이나 남았는데 감나무만 지키고 있을 수도 없고 해서 그냥 외출을 했다.
   그날 저녁, 집에 오자마자 으악! 소리가 절로 나왔다. 밖을 내다보니 감이 한 개도 없이 몽땅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럴 수가!  분을 참지 못하고 밖을 서성거리는데 주민 한 분이 눈치를 채고 3층집에서 어제 오늘 감을 따더라고 슬쩍 귀띔을 해주었다.
   요즘은 이사를 와도 인사가 없으니 누가 언제 이사 왔는지 어떤 사람이 사는지 알지도 못한다. 후다닥 뛰어올라가 벨을 누르니 노인 부부가 손자를 앞세워 빼꼼히 문을 연다. 다짜고짜 “우리 감 땄지요?” 하니 손사래를 치며 절대 안 땄다고 시치미를 떼는 게 아닌가. 본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제서야 맛보려고 몇 개만 땄다고 얼버무렸다. 
   노인은 베란다에 걸터앉아, 낚시하듯 눈앞에 깔려 있는 감을 쳐다보느라 목 아플 일 없이 아래서 건져 올렸을 것이다. 약이 바짝 오른 나는 크게 화를 냈다. 다음 날 3층 며느리가 감 한 박스 들고 와 아무 말도 없이 우리 현관 안으로 쑥 밀어 넣고 갔다. 생각해 보면 노부부 눈앞에 주렁주렁 열린 감의 유혹이 얼마나 참기 힘들었을까, 아마 그분들도 옛적 시골에서 감나무를 키웠으리라. 바닥에 흔적 하나 없이 잘 딴 걸 보면 올림픽 후보감으로 막상막하 아닐까 싶어 혼자 웃었다.
   그리고 한 달 후 세를 살던 노부부와 아들네가 인사도 없이 이사를 갔다.
   감나무가 화가 난 걸까? 해거리 없이 잘 열리던 감이 금년엔 다 빠져버리고 몇 개만 남아 있다. 너무 더운 여름 탓이겠지.

 

 

최매희  -----------------------------------------

   최매희님은 수필가, 《좋은수필》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