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이나 영녕전이 갖춘 ‘대칭 속의 비대칭’이라든지, 삼도가 지닌‘직진과 우회의 묘미’라든지, 담장을 따라 난 잔디밭이 주는‘착시현상’이라든지 각각의 일리 있는 설명들은 왜 종묘가 아름다운지를 설명해준다. 건축과 제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안팎으로 세계문화유산인 종묘는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우리 문화재이다."
종 묘 / 최이해 (시인, 궁궐해설사)
종묘는 왜 아름다운가?
첫째, 건축과 조경의 완벽함이다.
종묘를 하늘에서 살펴보면, 백두대간의 기운이 북한산 보현봉으로 이어져 다시 인왕산을 거쳐 응봉을 따라 내려온 산경표 맨 아래쯤에 터를 잡았다. 지금 종묘와 동궐(창덕궁과 창경궁) 사이에 나 있는 율곡로를 지하화하는 공사를 하고 있는데, 끊어진 생태축을 복원하는 의미에 더하여 일제 강점기 의도적 문화기반 파괴 현장을 복원하는 의미가 있다.
여름에는 더욱 시원한 숲 그늘이 있어 찾고 싶은 곳이다. 숲의 천이에 따라 침엽수는 사라지고 활엽수만 무성하긴 하지만 생태 체험이 가능할 정도로 잘 관리된 숲속에 제례공간으로서 필요한 조경과 건축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못이 세 군데 있는데, 상지上池, 중지中池, 하지下池로 구분한다. 외대문을 들어서자마자 왼쪽에 있는 하지와 조금 들어가 삼도 오른쪽의 중지는 잦아드는 산세의 기운을 보충하기 위해 파서 조산을 만들었다. 명당수의 흐름도 살리고 화재 대비용 방화수 기능도 있다.
종묘에 들어서기 전 외대문을 마주하고 북쪽을 보면 보현봉이 오롯하다. 담장 안으로 들어서면 답사 순로에 따라 망묘루, 향대청, 재궁, 신주(전사청), 정전, 영녕전, 악공청 등의 건물이 제각각 기능에 합당한 적당한 크기로 배치되어 있다.
둘째, 죽은 자의 공간이라 옷깃을 여미게 한다.
신전이라 불러도 마땅할 것이다. 조선 왕조 육백 년을 이끈 역대 임금들의 신주가 한 곳에 모여 있는 것이다. 신주는 국가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임진 병자 양란을 겪으면서 임금이 몽진하는 와중에도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짊어지고 다녔다. 정전에 19실, 영녕전에 16실 도합 35실에 태조부터 순종황제까지 나란히 모셔진 신주는 신실 안에서 영면하고, 닫힌 판문은 정숙함을 더해준다. 조선의 임금은 27명이다. 그 중에서 연산군과 광해군은 종묘에 없다. 그 대신 태조의 4대조 할아버지(목조 익조 도조 환조)는 추존되어 영녕전의 가운데 솟을지붕 네 칸에 있고, 반정을 포함하여 왕위 계승이 방계로 이루어진 임금의 아버지를 추존하여 다섯 칸에 있고, 일제 강점기를 살아내야 했던 비운의 황태자 영친왕이 영녕전의 맨 동쪽 칸에 있다. 각 칸마다 왕비의 신주도 있다. 많게는 세 분까지. 영친왕 칸에는 이방자 황태자비가 있어서 일본 관광객들은 여길 배경으로 사진을 찍곤 한다.
궁궐에 비해 단청은 극히 제한적이다. 짙은 붉은색과 흐린 녹색만 보인다. 못에는 꽃을 심지 않는다. 물고기도 기르지 않는다. 못 가운데 섬에는 소나무가 아닌 향나무가 심어져 있다. 숲에서 피고 지는 자연적인 나무 외에는 별도로 꽃나무를 심지 않았다. 건물마다 현판도 없다. 건물의 이름도 지위와 기능을 설명하는 선에서 그쳤다. 개방된 공간이 아니라는 말이다. 누구나 제관이 되면 따로 익혀서 예법에 따라 제사를 모시면 된다는 뜻이다.
비 내리는 어둑한 시간에 정전의 한 귀퉁이에 앉아 ‘태정태세문단세?를 헤아리면서 역사만큼이나 길게 늘어진 풍경의 한 점이 되어보면 마음이 어느새 순수해지는 것이다. .
셋째, 질서 정연한 시간과 만날 수 있다.
종묘는 태조가 새 왕조를 열고 고려의 수도 개경에서 한양으로의 천도를 결심하고 신중하게 터를 잡아 경복궁을 법궁으로 앉히면서 동시에 건축되었다. ‘좌묘우사’즉, 왼쪽에는 종묘를 오른쪽에는 사직단을 세웠는데, 이는‘전조후시’즉, 앞에는 6조 거리를 뒤에는 시장을 세운다는 주례 고공기에 근거한 디자인이다. 주례란 당시로서도 2천 년이나 앞선 중국의 주나라 예법을 적은 책이다.
그리하여 4대 봉사를 기준으로 하는 유교의 예법에 따라 때가 지난 임금의 신주를 땅에 묻어야 한다는 시점에 별전을 지어 조천하기로 하여 영녕전이 만들어졌으며, 불천위가 늘어나자 당초 7칸이던 정전은 차례로 4칸씩 세 번에 걸쳐 동쪽으로 증축되었다. 조천위도 늘어나자 영녕전도 당초 4칸이던 것이 좌우로 2칸씩 4칸을 세 번에 걸쳐 동서로 증축되었다. 다만 태조의 4대조와는 구별하여 협실로 꾸며져 솟을지붕처럼 높낮이가 있는 건물이 되었다.
어디가 높은 자리인가? 서상이라 하여 서쪽이 위이다. 그래서 정전의 맨 서쪽에 태조가 모셔져 있다. 지붕 높이로 구별된 영녕전도 나머지 협실은 맨 서쪽에 정조가 모셔져 있다.
정전의 하월대 가운데에는 부알판위가 있다. 새로 들어오는 신주가 먼저 모셔진 선왕들에게 고하는 자리이다.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 갔다가 끝내 사사당한 단종은 사후 273년 만에 숙종에 의해 복원되었는데, 이곳 부알판위에서 태조 태종 세종 세 임금의 신실만 열어 부알을 고하고 곧장 영녕전으로 조천되었다.
폐위된 두 임금의 신주를 거부하고, 단종과 같은 역사적 이야기가 숨어 있는 종묘에 가면 마치 멈춰버린 것 같은 시간을 만날 수 있다..
넷째, 제례가 현재진행형이다.
종묘는 겉으로 볼 수 있는 조경과 건축만 세계문화유산이 아니라 그 안에 숨 쉬고 있는 종묘제례악도 세계유산이다. 무형유산인 것이다. 제례악은 악, 가, 무 세 가지가 어우러져 이루어진다. 음악을 연주하는 악공과 가인이 있고, 춤을 맡은 일무원들이 문무와 무무를 번갈아가며 춘다. 일무란 줄을 서서 단체로 춤을 추는 것을 말한다. 고종이 황제국을 선포한 이래 8일무를 추고 있다.국가가 예법을 정한 오례에는 가례, 흉례, 길례, 군례, 빈례가 있는데 제례는 길례라서 죽은 이를 기쁘게 하기 위해 제례악이 연주된다. 음악과 술잔으로 기쁜 마음이 된 조상이 내려주는 복을 받는다는 것인데 이를 위한 절차가 빠짐없이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신을 맞이하는 예를 시작으로 보내는 예까지, 초헌, 아헌, 종헌. 세 번에 걸친 헌주 절차를 맡는 헌관과 이를 돕는 제관들이 전통 복장을 갖춰 입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낸다. 종묘제례보존회가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종친들을 중심으로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경건하게 치러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타성들에게도 문호는 열려 있다.
이 외에도 정전이나 영녕전이 갖춘 ‘대칭 속의 비대칭’이라든지, 삼도가 지닌‘직진과 우회의 묘미’라든지, 담장을 따라 난 잔디밭이 주는‘착시현상’이라든지 각각의 일리 있는 설명들은 왜 종묘가 아름다운지를 설명해준다.
건축과 제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안팎으로 세계문화유산인 종묘는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우리 문화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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