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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 2013년 8월호, 다시 읽는 좋은수필] 산죽山竹을 아시나요 - 장돈식

신아미디어 2013. 10. 13. 20:48

"줄기가 늠름한 나무, 여름에 잎이 청청한 나무, 가을에 천자만홍千紫萬紅의 단풍들, 그리고 그 나무들의 쓰임새들을 보면서 누가 이 난쟁이 산죽을 눈여겨보기나 하겠는가. 그러나 이 녀석들은 개의치 않는다. 그리고 묵묵히 누구의 이목도 닿지 않는 땅속에서 뿌리를 넓혀가고 있다. 뿌리줄기가 빽빽하면 땅 위에 자기만의 덤불을 이루어 다른 식물이 침범을 못 하게 할 수 있다."

 

 

 

 

 

 

 산죽山竹을 아시나요     장돈식

 

 

   개울 건너에 한 무더기 산죽이 있다. 4년 전쯤으로 기억한다. ‘나도박달나무’와 피나무의 그늘이 드리우는 곳에 한 무더기의 산죽이 자라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때는 여염집 안방만 한 군락이더니, 지금은 배나 되게 판도를 넓혔다. 이 나무 무리가 어떻게 무슨 경로로 여기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항간에서는 조리를 만드는 데 쓰인다고 해서 ‘조릿대竹’라고 하고, 식물학적 분류로는 ‘볏과에 속하는 목본’이다. 산죽은 봄, 여름, 가을은 무성한 나무들과 억새나 갈대 같은 키 큰 풀에 가려지고 짓눌려서 자기의 존재를 나타내지 못한다. 수고樹高라야 사람의 무릎에 닿을 정도다.
   다른 식물의 기세에 눌려서 가녀린 이 나무 무리가 사위어 없어지지나 않았을까 눈여겨보았었다. 그러나 늦가을 산야의 푸름이 조락凋落하는 시기를 맞으면 서둘지 않고 느긋이 자태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 녀석들처럼 때를 기다려 자기를 드러내는 종류도 흔치 않다는 생각을 한다.
   대나무는 온난한 기후를 좋아하는가 보다. 나의 고향, 38선 이북, 우리 집의 뒤란 구석에는 ‘살矢대竹’ 무리가 있었다. 그 대나무는 화살과 담뱃대를 만들기에 맞춤한 굵기와 높이여서 옛날 전쟁 때에는 군납에 시달렸다던 얘기를 어른들에게서 들었었다. 그 고장이 댓과竹科의 북방 한계선이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키 큰 대나무를 처음 본 것은 이남에 와서 충청도 아랫녘에서였다.
   학자들은 설악산에는 지금의 백 년 이상 수령의 소나무가 마지막일 거라고 한다. 옛날에는 그곳에 대나무 먹기를 좋아하는 곰이 많아 산죽의 식생植生을 조절, 알맞은 밀도였으나 곰이 멸종된 지금은 천적이 없는 ‘조릿대’가 밀생하여 솔 씨가 뿌리내려 자랄 수 없다는 것이다. 비슷한 예는 제주에도 있었다. 그 섬의 높은 기온과 관계가 있는지 온 섬의 산야를 점령하며 판도를 넓히고 있었다. 한라산의 상당히 높은 곳까지 이르니 댓잎만 먹고는 살 수 없는 노루와 고라니가 인가 근처까지 내려와서 농작물에 피해를 주다가 밀렵꾼들에게 희생되는 녀석들이 많다고 했다.
   사람들은 올림픽, 월드컵 등 국제경기에서 우리가 좋은 성적을 올릴 때 열광한다. 그렇게 국민을 즐겁게 하고 국위를 선양하는 경기 종목 중에는 비인기 종목도 있다. 평소에는 그런 경기도 있느냐 싶게, 관심의 대상 밖에 있는 송구도, 필드하키도 그렇다.  그 종목의 선수들은 누가 인정하든 말든 묵묵히 연습에 열중하다가 국제무대에 나가서는 금메달, 은메달을 차지하며 우리를 자랑스럽게 하는 것을 볼 때면 나는 늘 이 산죽이 떠오른다.
   줄기가 늠름한 나무, 여름에 잎이 청청한 나무, 가을에 천자만홍千紫萬紅의 단풍들, 그리고 그 나무들의 쓰임새들을 보면서 누가 이 난쟁이 산죽을 눈여겨보기나 하겠는가. 그러나 이 녀석들은 개의치 않는다. 그리고 묵묵히 누구의 이목도 닿지 않는 땅속에서 뿌리를 넓혀가고 있다. 뿌리줄기가 빽빽하면 땅 위에 자기만의 덤불을 이루어 다른 식물이 침범을 못 하게 할 수 있다.
   시나 서예와 다른 문예들에서도 송죽松竹의 절개를 상찬賞讚하는 것은 소나무와 함께 서리와 눈의 오상고절傲霜孤節에도 절개를 굽히지 않는 데서 사군자에 들고, 십장생으로 꼽히는가 보다. 나의 거처는 비록 산중이라고는 하나 초록이 귀한 겨울 계절에는 이 산죽이 있는 데를 찾는다.
   거기가 눈 위일지라도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 마주 보며 저들이 탄소동화작용으로 내뿜는 산소를 들이마시고 탄소를 불어준다. 그때 그와 나는 세상을 같이 살아가는 이웃으로의 진한 애정을 느낀다.

 

 

 

장돈식  -------------------------------------------------

   장돈식님은 황해도 장연 출생(1920~2009). 인천에서 ‘가나안 농원’ 경영, 1990년 《한국수필》에 〈취하는 것이 술뿐이랴〉로 등단, 저서 《언덕 위에 머문 향기》, 《빈 산엔 노랑꽃》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