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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 2013년 7월호, 신작수필] 불퉁지 버무리던 날 - 한경선

신아미디어 2013. 9. 30. 08:34

"객지에서는 고향 까마귀도 반갑다지만 그를 만난 것은 그런 반가움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별다른 느낌이었다. 세상일은 안중에도 없이 비를 타고 무지개 너머로 달아나려던 사람이 고향 사람이라고 나를 알아보다니. 내가 형수뻘 되는 것까지 알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는  지금도 내가 떠나온 마을을 지키고 있다. 처음으로 마주 본 그의 눈은 옛집 외양간에 있던 송아지 눈을 닮았었다."

 

 

 

 

 

 

 불퉁지 버무리던 날     /  한경선수필가


   해가 저무는 건널목에 사람들이 모여 붐볐다. 신호등 아래 시든 상추 한 소쿠리가 보였다. 마침 동 오른 상추다. 며칠 전 입맛 잃은 어머니께서 “하지가 지나면 불퉁지가 먹을 만한디…….”하시던 말씀이 생각나 반가웠다.
   노랗게 날리던 송홧가루도 잠잠해지고 산밭 고랑에 뻐꾸기 소리가 떨어질 무렵이면 봄 입맛을 돋우던 상추에 동이 오른다. 한 잎씩 따내던 이파리는 점점 작아지고 상추는 서둘러 꽃대를 밀어올린다. 꽃이 피기 전 통통한 꽃대를 설렁설렁 끊어 둥근 돌로 툭툭 깬 다음 소금으로 살짝 숨을 죽인다. 확독에다 통고추와 마늘을 갈아서 김칫거리를 넣고 바로 버무린다. 마당 우물가에 있는 확독은 보리나 콩, 들깨를 갈고 겉절이도 버무리는 요긴한 돌이었다.
   어머니가 말하는 불퉁지는 그것이다. 하루내 밭에서 일을 하고 돌아온 어머니의 어머니가 텃밭의 상추 대를 끊어다가 반찬을 만들어 서둘러 차려 주시던 초여름 맛이다. 고단한 땀이 몇 방울 떨어진 김치, 살짝 으깨진 상추대가 연한 상추 잎과 섞여 입안을 쓰다듬고는 이윽고 가슴까지 닿아 쌉쌀한 하루를 어루만지는 맛이다.
   손으로 한 가닥 집어다가 밥숟가락 위에 척 걸쳐서 우물우물 꿀꺽 삼키면 소박한 밥상에 둘러앉은 식구들이 새삼스레 가슴으로 확 당겨지는 그런 맛이다. 노란 상추꽃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 둘 별로 피어나는 맛이다. 초저녁 졸음이 나붓이 내려앉는 맛이다.
   어머니가 외할머니와 씀바귀 앉은 고향 돌담을 품고 하는 말씀이라는 것을 안다. 담 너머로 갓 버무린 김치 한 보시기 주고받던 어릴 적 그림이 머릿속에 환하게 그려지고 있을 것이다. 철이 들지 않아도 좋았던 시절, 그때 먹었던 음식들이 갈수록 기억 속에서 옛정처럼 되살아나는 것이 분명하다. 텃밭이 제 세상인 양 흐드러지게 키를 키우던 상추여서 여태 귀한 줄 몰랐다.
   상추를 담은 봉지를 들고 돌아설 때였다. 낯익은 얼굴과 딱 마주쳤다. 까맣게 잊고 있던 고향 사람이다.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는 일이 없었다. 들로 산으로 뛰어다니면서 날궂이를 하던 사람이다. 그가 혼자 중얼거리면서 뛰어다닌 다음 날은 꼭 비가 온다고 했다. 새댁이었던 나와는 제법 떨어진 마을에 살았지만 뛰어다니던 그를 먼빛으로 몇 번 보아 알고 있다. 밥술깨나 먹던 집안이었고, 머리 좋은 형제들이 있는 사람이 왜 그러는지 아무도 몰랐다. 그런 그가 어찌어찌 장가를 들어 딸 하나 낳은 일도 면소재지 구석구석에 퍼졌던 이야기다.
   짧은 머리와 두리번거리며 서두르는 듯한 모습이 예전 그대로였다. 반가운 마음에 그가 나를 못 알아볼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고 먼저 말을 건넸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어- 어, 형수. 나? 놀러 나왔지.”하는 것이었다. 도시로 이사 온 지 십 년이 지난 나에게 여기로 이사 나왔느냐고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 말에 괜히 울컥 목이 메었다.
   우리는 마치 오랜 친구처럼 인사를 나누었다. “딸은 많이 컸지요?” “인자 고등학생이여.” 환한 그의 대답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이쪽으로 쭉 내려가면 어디 가는 길이여?” 할 땐 곧 날이 어두워질 텐데 아직도 낯선 길에 있는 그가 걱정스러웠다.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동안 자주 길을 물으라고 당부했다. 처음 길은 아닌 듯하고 대답이 당당해서 그나마 마음을 놓았다.
   객지에서는 고향 까마귀도 반갑다지만 그를 만난 것은 그런 반가움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별다른 느낌이었다. 세상일은 안중에도 없이 비를 타고 무지개 너머로 달아나려던 사람이 고향 사람이라고 나를 알아보다니. 내가 형수뻘 되는 것까지 알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는  지금도 내가 떠나온 마을을 지키고 있다. 처음으로 마주 본 그의 눈은 옛집 외양간에 있던 송아지 눈을 닮았었다.
   확독 대신 도마 위에 상추 대를 놓고 작은 절굿공이로 툭툭 두드렸다. 살짝 숨을 죽여 씻은 다음 물기를 뺐다. 갈아서 얼려 놓았던 물고추를 녹여 갖은 양념을 했다. 길에서 만난 사람 이야기도 넣고, 어머니가 그리는 초여름 저녁과 잃었던 입맛이 살아나기를 바라며 김치를 버무렸다. 지금쯤 고향 텃밭엔 상추꽃이 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