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 붐 세대, 소위 낀 세대인 난 이 문제가 남의 일만 같지가 않다. 곧 닥쳐올 내 일인 것이다. 노인들의 소외감과 고립감을 없애기 위한 사회적인 제도가 다방면으로 속히 마련되어야 할 것이며, 무엇보다도 가족과 이웃의 따뜻한 관심과 사랑이 최우선이 아닐까 싶다. 애써 감추어 왔지만 늙는다는 것은 사실 참 서글픈 일이다. 어딘가에는 불로문不老門도 있다 하니 늙음은 모든 이들이 다 싫어하는 까닭일 게다. 아무래도 잠자기는 그른 성싶다. 신문과의 숨바꼭질 놀이나 계속해야 할 것 같다. 신 나는 기사를 찾아서 난 오늘도 술래를 자청한다."
잠 못 드는 밤에 - 이상분수필가
새벽 2시다. 좀처럼 잠이 오지 않는다.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을 청하여 보건만 멀리 달아난 잠은 쉬 올 것 같지가 않다. 정신은 점점 맑아지고 실타래처럼 엉켜진 생각들은 끝도 없다. 요즘 들어서 불면증이 부쩍 심해졌다. 의학상으로는 갱년기장애라고 하며, 노화현상으로 내분비기능의 균형이 깨지면서, 여러 가지 복합적인 증후군이 나타난다고 한다. 시집을 꺼내어 읽어보고, 『성경』도 펼쳐 보지만 이것마저도 눈이 침침하고, 눈꺼풀이 뻑뻑하여 접어 두고 만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늙어가는 까닭임을 어쩌랴. 갱년기更年期. 이것을 한자로 풀면 다시 更 해 年 정할 期로 인생을 다시 시작하는 시기라 하여 긍정적인 의미가 있다고 하니, 자연의 이치와 순리로 받아들일 수밖에.
TV를 켠다. 채널마다 싫증 난 몸 개그와 말장난만이 난무하고 있다. 옆에서 코를 골며 자는 남편이 한없이 부럽다. 대전까지 내려가 교육을 받고 오더니 몹시도 피곤한 모양이다. 부스럭거림도 아랑곳하지 않으니 말이다. 이런 무심함이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른다.
잠자기를 포기하고 서재로 나왔다. 갑자기 불을 켜자 잠자고 있던 사물들이 아우성을 치며 일제히 깨어난다. 공연히 미안해진다.
조심스럽게 책상 앞에 앉아 본다. 묵향이 가득하다. 낮에 펼쳐 놓았던 문방사우文房四友가 탐탁지 않은 듯 뜨악한 표정들이다. 마음을 가다듬고 붓을 잡아본다. 초야를 치르는 새색시처럼 손끝에 미세한 떨림이 전해지고, 문창호지를 뚫고 몰래 엿보는 이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순간 긴장감이 돈다. 언제부턴가 난 이 떨림을 꽤 즐기고 있다. 한 자 한 자씩 여백을 채워 나가다 보면 떨림은 이내 사라지고 일필휘지一筆揮之로 붓놀림에 거침이 없다.
“판매시스템을 바꿔야 한다니까.”
남편의 잠꼬대다. ‘농산물 인증제도’니 ‘친환경 무상급식’이니 하는 단어들이, 열린 방문 틈으로 들어와 내 귀를 자극한다. 어느 때부터인지 일에 몰두할 때마다 자면서 큰 소리로 떠드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나 그 외침도 일상이 되어 이제는 낯설지가 않다. 꿈속에서도 매우 신명이 나 있는 듯하다.
남편은 지금 농약과 화학 비료에 의존하지 않는, 유기농 농산물을 생산하기 위하여 상당한 모험을 감수하고 있다. 농약 대신에 난황류와 천적을 이용하여 병해충을 막고, 화학비료 대신 미생물을 만들어 쓰고 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또 흙을 알아야 산다.’는 말을 입에 달고서 늘 새로운 정보에 목말라 하며 동분서주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자연농업을 배우고 실천하면서 늘그막에 그가 매우 긍정적인 모습으로 변해 있다는 사실이다. 놀라운 변화다.
“농부도 농사를 짓는 농예가야. 자연이라는 화선지에 생명체가 있는 그림을 그려내는 화가란 말이지.”
자칭 예술가의 이 오만함을 그 누가 말리랴. 그러나 나는 믿는다. 그의 화선지에다 오만의 필력으로 위기의 농업을 희망의 농업으로 탈바꿈해 놓을 것임을.
시계를 보니 3시가 조금 넘었다. 날이 밝으려면 아직도 멀었건만 멀리서 닭 울음소리가 들린다. 그 닭도 틀림없이 갱년기가 와 있을 터. 동병상련同病相憐으로 측은지심惻隱至心이 인다.
화선지 두 장이 채워졌다. 마음이 바르면 붓도 바르다고 했거늘 정갈치 못함이 역력하고, 일취월장日就月將의 꿈이 너무 과한 탓인가 획이 난잡스럽다. 마음을 비우고 때를 기다려야 하리라. 기다릴 줄 아는 자만이 내일이 있다고 하지 않던가.
문득 젊은 시절이 스친다. 예나 지금이나 그다지 잠은 많지 않지만, 임신했을 때만큼은 예외였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쏟아지던 졸음. 정미소와 목장을 했던 그 당시엔 인부들과 시집 식구들의 식사 준비만으로도 벅찬 날들이었기에, 쪽잠 잘 기회마저도 주어지지 않았다. 오로지 밤잠만이 보약이었고, 새벽잠은 왜 그렇게도 꿀맛이었는지. 그때의 심정으로는 할 수만 있다면 밤을 그대로 멈추게 하고 싶은 마음만이 간절했었다. 도통 잠이 없으셨던 어머님 때문에 더 힘들었던 세월이었지 싶다. 생각해보니 참으로 아득한 날들이다.
저만치서 오토바이가 새벽바람을 가르고 달려오고 있다. 문간에 무심히 던져지는 신문 떨어지는 소리가 오늘따라 반갑다. 문을 여는 순간 꽃샘바람이 와락 달려든다. 봄바람에 중늙은이 얼어 죽는다더니 정말 매섭다. 신문을 펼치니 대관령은 영하 13도까지 떨어졌고 영동지방 곳곳에서는 폭설이 내렸다고 한다. 날씨마저도 내 몸처럼 변화무쌍하다.
돌봄이 없는 노부부가 자살했다는 보도와, OECD국가 중 우리나라 노인 자살률이 최고라는 붉은색의 큰 활자가 한눈에 들어온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베이비 붐 세대, 소위 낀 세대인 난 이 문제가 남의 일만 같지가 않다. 곧 닥쳐올 내 일인 것이다. 노인들의 소외감과 고립감을 없애기 위한 사회적인 제도가 다방면으로 속히 마련되어야 할 것이며, 무엇보다도 가족과 이웃의 따뜻한 관심과 사랑이 최우선이 아닐까 싶다. 애써 감추어 왔지만 늙는다는 것은 사실 참 서글픈 일이다. 어딘가에는 불로문不老門도 있다 하니 늙음은 모든 이들이 다 싫어하는 까닭일 게다.
아무래도 잠자기는 그른 성싶다. 신문과의 숨바꼭질 놀이나 계속해야 할 것 같다. 신나는 기사를 찾아서 난 오늘도 술래를 자청한다.
'월간 좋은수필 > 좋은수필 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은수필 2013년 8월호, 다시 읽는 좋은수필] 산죽山竹을 아시나요 - 장돈식 (0) | 2013.10.13 |
---|---|
[좋은수필 2013년 7월호, 마니아코너] 섬집 아기 - 김순희 (0) | 2013.10.04 |
[좋은수필 2013년 7월호, 신작수필] 불퉁지 버무리던 날 - 한경선 (0) | 2013.09.30 |
[좋은수필 2013년 7월호, 신작수필] 둘째와 행운목 - 이현재 (0) | 2013.09.28 |
[좋은수필 2013년 7월호, 신작수필] 마음에 녹화 - 선정은 (0) | 2013.09.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