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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 2013년 7월호, 신작수필] 주변인물에서 주인공으로 - 박현정

신아미디어 2013. 9. 17. 08:16

"가끔 평소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에 흔들리는 나를 보고는 어, 이게 아니었는데 하다가 어느새 생활의 중심에 자리한 그것에 마음과 시간을 바치는 나를 발견하고 의아해하는 때가 있다. 잠깐만 해보자 했던 일이 뜻밖에 중요한 일로 자리잡기도 하고, 혼자 있는 시간에 심심풀이 삼아 시작한 놀이가 나중에는 애정을 바치는 벽이 되어 나를 움직이기도 한다. 반대로 하찮게 생각하고 젖혀두었던 것이 사실은 소중한 것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기도 하고, 약점으로 여겼던 것이 오히려 성장의 발판이 되고 매력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것은 나 자신조차 나를 진정으로 몰랐으므로 진행된 결과 아니었을까."

 

 

 

 

 

 주변인물에서 주인공으로    박현정수필가


   탄탄한 이야기에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반전이 치밀하고 설득력 있게 숨어있어 독자를 즐겁게 한다. 처음에는 미미하여 세상에서 무시당하던 인물이 성장하여 기존 세력에 영향력을 미치는 주인공으로 설 때, 혹은 본인이 이용하려는 사람을 오히려 상대방이 역이용할 때 흥미를 느낀다. 조선 왕실의 역사 속에서 주인공과 주변인물로 자리한 많은 사람들은 뜬구름 같은 권력을 놓고 경쟁한다. 그들이 벌이는 두뇌 싸움은 시대와 환경에 맞물리면서 진행된다. 이렇게 선택된 이들의 인생에도 뜻밖의 반전이 벌어지는 것을 보며, 그들도 빈틈이 있는 인간이었구나 생각한다.
   조선시대 후반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절정이던 시기, 뜻밖에 젊은 철종이 후사가 없이 죽는다. 이때 세도정치의 그늘 아래서 자신의 야망을 숨기며 기회를 기다리던 왕족 이하응은 둘째 아들을 왕으로 세우면서 권력의 중심으로 들어간다. 이어 고종의 비를 간택해야 할 때, 흥선 대원군은 명문가의 자제이기는 했으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한미해진 집안에서 성장한 민치록의 딸을 며느리로 삼는다.
   권력자의 자리에서 보면 보잘것없는 처지일 수 있는 여인을 흥선 대원군이 며느리로 삼은 것은 아버지도 형제자매도 없는 여자라면 뒷받침되는 세력이 없으니, 왕비의 자리에 있다 해도 외척 세력이 자리잡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아들 고종처럼 시아버지의 뜻에 고분고분하리라는 계산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민비는 시아버지에게 만만치 않은 맞수로 성장해 그를 권력의 중심에서 밀어낸다. 내 영향력 아래서 주변인물로 살아줄 것 같던 사람이 예상 밖에 자신을 견제하며 압박해올 때 사람들은 당황하고 괘씸해한다. 이때 느끼는 당혹감은 처음부터 내 편이 아니라고 간주한 사람의 도전보다 더 큰 분노로 이어질 수 있다.
   한편, 세상의 누구라도 자기 인생을 반석 위에 세우고 싶어한다. 더구나 일국의 왕비라는 자리가 주어진 이라면 더 그럴 것이다. 어떤 과정을 거쳐 왕이 되었든 시아버지의 권력은 남편인 고종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나이가 어려서는 의지할 수 있다 해도 고종과 민비가 성장하고 화합한 이상 자신들의 것이라고 생각한 권력을 당연히 가지고 누려야 한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민비는 흥선 대원군이 친정하는 동안 자기 세력을 모으고 키워 척족을 만들고, 처음에 자신을 도외시하던 고종의 마음을 얻는다.
   허술하고 어리석은 사람인 양 행세하여 안동김씨 일파를 안심시키고, 왕의 아버지가 되어 권력에 오른 흥선 대원군과, 작은 여자아이로 보잘것없으리라고 시아버지를 안심시키고 왕비가 된 명성황후가 비슷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시아버지는 살아남아 언젠가는 내 뜻을 펼쳐보리라는 의지를 감춘 의도된 것이었고, 민씨는 자신의 본래 처지가 그러했던 것이지만, 그녀는 남편과 달리 영리하고 강한 기질의 여성이었던 것이다. ‘조는 집안에 자는 며느리 들어온다.’는 말처럼, 시아버지와 비슷한 속성을 가진 며느리가 이씨 집안에 들어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가끔 평소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에 흔들리는 나를 보고는 어, 이게 아니었는데 하다가 어느새 생활의 중심에 자리한 그것에 마음과 시간을 바치는 나를 발견하고 의아해하는 때가 있다. 잠깐만 해보자 했던 일이 뜻밖에 중요한 일로 자리잡기도 하고, 혼자 있는 시간에 심심풀이 삼아 시작한 놀이가 나중에는 애정을 바치는 벽이 되어 나를 움직이기도 한다. 반대로 하찮게 생각하고 젖혀두었던 것이 사실은 소중한 것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기도 하고, 약점으로 여겼던 것이 오히려 성장의 발판이 되고 매력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것은 나 자신조차 나를 진정으로 몰랐으므로 진행된 결과 아니었을까.
   하물며 타인의 환경이나 자기에게 보이는 모습만으로 상대를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때로 얼마나 오만한 인간의 판단일까. 세상에는 약하기만 한 사람도 쉬운 상대도 없다. 기회가 주어지고 상황이 바뀌면 변할 준비가 되어 있는 씨앗이 누구에게나 숨어 있는 것이다. 아마 반전은 이런 인간의 오만한 틈을 노리는 것이어서 더 흥미로운 것이 아닐까. 흥선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대립 이야기가 오래 내 안에 남은 것은 역사에 앞서 사람들의 겉과 안, 말과 마음의 연결고리를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고 휘청거린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거라는 공감 때문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