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도 맛있고 술도 잘 받았다. 어느새 소주 두 병을 다 비웠다. 부자간에 잔을 주고받으면서 정담을 나누는 일은 더없이 흐뭇하고 행복하다. 큰애가 있었더라면 더욱 좋았을걸. 외국에 가 있어 같이 못함이 못내 아쉽다. 어떻든 올해 복달임은 다른 어느 해보다 옹골졌다."
복달임 - 하병주수필가
아내가 아침부터 부산하게 들락거렸다. 동네 슈퍼마켓에서 돼지고기, 당면, 시금치 등을 사다가 잡채를 만들더니 또 멀리 S마트까지 가서 토종닭을 사왔다. 생각해보니 초복初伏 날이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아내는 원래 대명절, 제삿날, 또는 우리 부부의 생일에 애들이 오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무슨‘날’을 챙겨서 음식을 만든다거나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더구나 나이 들면서부터는 밥하고, 설거지하고, 빨래와 청소하는 등의 일에 주니를 내고 있는 터였다. 먹지 않고도 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되뇌어왔다. 그러니 명절도 아닌 복날에 금전과 노력을 투자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나이 들어 그러려니 하면서도 집안일이라고 해봐야 단둘이 사는 살림에 뭐가 그리 힘들다고 늘 투정을 부리는가 싶어 서운하게 생각될 때가 더러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일까. 아이들 다 내보내고 둘이만 호젓하게 살다 보니 복날 챙길 생각도 하는구나 싶어 기특하고 고마웠다. 무엇이든 도와주고 싶었지만 아내는 평소 여자가 주방 일을 할 때는 남자가 나가주는 것이 도와주는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해 왔기에 모른 체하고 등산복 차림으로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야생화를 찾아 사진을 찍으면서 산골짝을 헤매다 보니 어느새 몇 시간이 흘렀다. 배가 고팠다. 황기를 넣고 푹 삶은 토종닭이 눈에 삼삼했다. 날개 한 조각 뚝 떼어들고 소주 한잔 쭉 들이킬 생각을 하니 입에 군침이 돌았다. 서둘러 산에서 내려왔다.
집에는 아내가 없었다. 냉장고에서 소주병부터 꺼내들고 이리저리 둘러봐도 삶아놓은 닭이 눈에 띄지 않는다. 눈에 띄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닭 삶은 냄새도 안 난다. 다만 식탁 위에 잡채 한 접시가 달랑 놓여 있을 뿐이다. 웬일일까. 한참을 기다리다가 아내에게 전화를 해봤다. 딸네 집에 와 있다는 대답이었다. 요새 딸이 입덧이 심해서 먹지도 못하고 고생하고 있어 뭘 좀 해 먹이려고 한다는 것이다. 닭은 생닭으로 그냥 가져왔고 복날인지는 알지도 못했단다. 두말없이 전화를 끊고 말았다. 야속하고 서운하고 배신감마저 들었다. 바람 불면 날아갈 것같이 연약한 외동딸이 서른여섯이라는 나이에 첫애를 가져 심한 입덧으로 고생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토종닭을 사왔으면 구워서 안주하라고 날개 한쪽이라도 떼어 놓고 가든가, 처음부터 두 마리를 사서 한 마리를 두고 갈 일이지 한 마리를 달랑 사서 통째로 가지고 가 버리다니. 처자식을 위해서 꽃다운 내 젊음을 바친 게 부질없고 억울하게 생각되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대접에다 소주 한 병을 다 따라서 막 들이키려고 하는데 전화가 울렸다. 벨이 여러 번 울려서야 받아보니 둘째 아들이었다.
“오늘 초복인데 복달임은 어떻게 하세요?”
“복달임이 다 뭐냐!”
죄 없는 둘째에게 퉁명스럽게 쏴붙이고 그간의 사정을 하소연하듯 털어놨다. 말을 다 듣기도 전에 한참 동안을 웃어대고는 지금 곧 갈 테니 잠깐만 기다리라고 했다.
오래지 않아 둘째가 보신탕과 수육을 듬뿍 사고 수박 한 덩이까지 한 아름 안고 들어왔다. 둘이 마주앉아 술자리가 벌어졌다. 내가 어렸을 때는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아버지라면 그저 무섭기만 했지 같이 대작을 한다거나 터놓고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둘째는 큰애의 그늘에 가려 종종 한 걸음 물러나 있었다. 편애라고까지 할 수는 없어도 큰애에게 만큼 관심을 갖지는 않았던 게 사실이다. 그런 중에도 구김살 없이 자라 큰애 못지않게 살갑고 자상하다. 대견하면서도 속으로는 늘 미안하다. 어릴 때 직장관계로 지방으로 이사가면서 제 외할머니에게 맡겨놓은 일이 있었다. 나중에 보니 외할머니에게 엄마, 엄마 하면서 따랐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조차도 마음에 걸린다. 열 손가락 깨물어보면 좀 덜 아픈 손가락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은 있지만 자식에 대한 부모의 정이 어찌 차이가 있을까.
고기도 맛있고 술도 잘 받았다. 어느새 소주 두 병을 다 비웠다. 부자간에 잔을 주고받으면서 정담을 나누는 일은 더없이 흐뭇하고 행복하다. 큰애가 있었더라면 더욱 좋았을걸. 외국에 가 있어 같이 못함이 못내 아쉽다. 어떻든 올해 복달임은 다른 어느 해보다 옹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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