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수필과 비평/수필과비평 본문

[수필과비평 2013년 6월호, 추모특집- 라대곤 선생을 추모하며/작품세계] 비틀린 세상을 향해 내지르는 풍자 미학 - 호병탁

신아미디어 2013. 8. 2. 18:00

"소설은 그 자체가 치열한 삶의 현장이다. 우리는 독서를 통해 소설에 수용된 현실과 맞부딪치게 되고 이 현실을 소설이란 변증의 방법으로 총체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라대곤은 “시대의 분노와 아픔을 고발하는 책임감 있는 소설을 한 편쯤은 써야 한다고 생각”(≪유산≫, 작가의 말)해 왔다. 그러나 같은 글에서 그는 “남을 선도하고 깨치는 글은 애초부터 쓸 터수”가 못 된다고 한탄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단지 겸양의 말에 불과하다. 그는 성공적으로 자신이 원한 목표에 부응했다. 그는 욕망으로 점철된 삶의 현장에 우리 손을 이끌고 가 그것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과연 인간과 세계의 관계는 무엇인지,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어떠한 것인지 우리에게 묻고 있다. 라대곤은 같은 글에서 자신의 작품을 “철학이나 이념을 떠나서 소설의 재미로만 읽어 주었으면”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역으로 ‘소설의 재미’를 떠나서 ‘철학이나 이념의’ 아픔이 소설을 읽고 난 후 묵직한 통증으로 남게 되는 것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비틀린 세상을 향해 내지르는 풍자 미학    -  호병탁


1.
   전통적으로 문학작품을 내용과 형식으로 나누어 연구해왔다. 물론 이 두 가지를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닌 상호규정적인 것으로 보긴 했으나 전통문예학은 양자를 분리시켜 생각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이분법적 사고는 이제 자연스럽게 배제되고 있다. 문학에서 내용이 미적 구조의 일반적 법칙에서 제외되는 것이 아니며, 형식도 작품의 외형적인 것만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역동적인 존재로서 그 자체가 내용적인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용과 형식은 분리되지 않고 모두 구조로 파악되게 된다. 우리가 의미·가치·이념 등 내용적인 것을 ‘심층구조’로, 이를 다듬고 배열한 것을 ‘표면구조’로 파악하는 것도 내용과 형식 모두를 구조로 보려는 의도이다. 따라서 ‘소설구조’란 말을 사용할 때 우리는 이를 ‘소설을 이루고 있는 모든 요소와 그 요소들의 관계’로 정의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라대곤의 ≪망둥어≫의 소설구조를 살펴본다.
   라대곤의 문학세계는 한 마디로 자전적 경험의 기억과 강한 연결고리를 맺고 있고, 그것은 대개가 내면적으로 피를 흘려야 했던 뼈아픈 시간의 흔적들이다. 그 흔적은 일반사람이 느끼는 아픔과는 다른 특별난 것이어서 더욱 선명하고 깊은 트라우마로 각인되었고 그의 전작품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는 모든 수필작품에서 자신의 이런 정신적 외상을 고백하고 있다. 물론 소설의 여러 국면에서도 이런 상황은 직간접적으로 자주 나타난다. 그의 어떤 작품을 읽다가 데자뷰 현상처럼 이것은 ‘어디서 본 것 같다.’ 하는 느낌을 가질 때가 많다. 그러나 이는 일종의 착각인 기시감旣視感이 아니다. 작가의 사실적 경험이 다른 시기에 다른 상황 속에서 작품에 반복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다. 이런 모든 결과의 총합으로 한 작품에 나타난 것이 장편소설 ≪망둥어≫라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그의 문학적 기량이 비교적 원숙한 시기(2005)에 발표되었고 작가는 그 이듬해 이 작품으로 채만식 문학상 –그의 생애에서 가장 크고 영광스러운 상- 을 수상하였다. 최근에 ≪유산≫(2009)을 발표했지만 이 작품은 기존에 쓴 단편 <예기치 못한 수렁>과 <악연의 세월>을 합쳐 개작한 것임으로 아무래도 ≪망둥어≫가 라대곤의 대표작으로 여겨진다. 이 소설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고자 함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이 소설을 정독하면 그의 문학세계가 한눈에 보인다.


2.
   소설의 외형을 관찰해보면 대개가 우선 장르 표시, 작가, 제목이 나오고 이야기 내용이 시작된다. 내용은 부, 장, 절 등으로 나누어지고, 여기에 머리말, 맺는말이 붙어 있기도 하고, 소설의 서두, 혹은 각 장의 서두에 모토motto가 붙는 경우도 있다. 이 소설은 ‘장편소설’이란 문학적 장르가 표기되어 있고 ≪망둥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독자와 맨 먼저 맞부딪치게 되는 ‘제목’은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동시에 소설의 내용과 주제를 요약·암시하고자 그 작명에 작가가 매우 신경을 쓰는 부분이다. ≪망둥어≫는 독자의 호기심보다는 세태에 따라 ‘망둥이’처럼 폴짝거리는 인간의 경망한 모습을 암시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일반명사의 수수한 제목이다.
   그런데 그의 다른 소설도 마찬가지지만 ≪망둥어≫는 눈에 띄는 외형상의 특이성이 있다. 그것은 모토, 머리말, 맺는말이 없는 것은 물론 소설 구성에 상당히 중요한 요소가 되는 장과 절의 구분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더구나 ‘장편소설’에 있어 장과 절의 구분은 시의 연과 행의 구분처럼, 연극의 막과 장의 구분처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이를 무시하고 있다. 가끔 필요할 때 줄 한 칸 띠워 주는 것이 전부다. 다행이 작가의 설득력, 다시 말하자면 ‘입담’이 좋아 독자들이 쉽게 작품에 빨려 들어가지만 긴 독서의 여정에 휴게소 역할을 하는 장의 구분이 없는 것은 아쉽다. 작가가 만든 ‘서술된 이야기’와 독자가 만드는 ‘보완적 이야기’가 결합되어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된다고 보는 독자수용미학 측면에서 생각해도 독자의 상상력에 의해 메꿔지게 되는 이런 ‘빈 곳’에 해당되는 곳, 즉 장과 장의 구분은 필요하기 때문이다.


3.
   문학은 성격상 자신이 존재할 일정한 시간을 요구하게 되고 특히 소설은 어떤 다른 장르보다도 시간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서사문학의 본질이 ‘일어났던 어떤 일을 화자가 청중에게 이야기 해주는 것’으로 정의되는바 ‘일어났던 어떤 일’은 이미 현재가 아니고 과거를 말하는 것이며 시간 간격은 발생할 수밖에 없다. 문자로 읽는 소설인 경우 작가의 시간과 독자의 시간 사이에 또한 간격이 발생한다. 이처럼 여러 개 시간의 층이 존재할 뿐 아니라 화자가 사건의 순서대로 이야기하지 않고 앞뒤 시간의 순서를 흩뜨려 플롯을 구성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고, 서술도 자세하고 꼼꼼하게 하여 시간진행을 느리게도 하고 대충 줄여 빠르게도 한다. 때로는 아예 생략하고 뛰어넘어버리기도 한다. 소설 속에는 언제나 시계가 있다.
   라대곤은 소설 속의 시간을 어떻게 부리고 있는가. 우리는 아무래도 시간의 순서와 속도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현실에서는 어떤 사건이든 자연적 시간순서, 즉 달력 넘어가는 순서에 따라 발생하고 진행되고 끝이 난다. 그러나 작가는 역전逆轉과 예시豫示를 통해 이 순서를 흩뜨린다. ≪망둥어≫도 마찬가지다. 장편소설은 몇 년 혹은 몇 대에 걸쳐 일어나는 인생사를 주로 다룬다. 그러나 이 소설은 ‘서술되는 시간’, 즉 소설 내의 사건이 발생하여 끝날 때까지의 시간이 어느 해의 ‘6월 중순’부터 그 해의 ‘무서리가 내릴 무렵’까지 불과 몇 달에 불과하다. 따라서 서술 속도는 매우 빠른 편이다. 그런데 이야기가 시작되기 이전에 발생했던 일을 이야기 진행 중 삽입시키는 역전은 ≪망둥어≫에서 매우 특이한 형태로 나타나고 이 소설의 구성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물론 작중인물의 현재, 즉 진행되는 사건에서 벗어나는 역전은 ‘서술되는 시간’에 포함되지 않는다. ≪망둥어≫는 정확히 300쪽의 분량을 가지고 있는데 70쪽에서 183쪽까지의 엄청난 분량이 역전이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주인공이 노숙자가 되는 과정에서 끼어든 이 역전이 사건발생의 자연적 시간순서를 뒤바꾸는 단순한 과거회상적의 삽입이 아니라 노숙자가 되기까지의 현재까지 이어져 결국 전체의 서술되는 시간과 맞물리며 합류한다는 점이다.
   김제군 수곡리에서 가난한 홀아비의 아들로 성장하는 주인공, 또래인 혜련과의 사랑, 그녀 모친의 추잡한 정사를 우연히 목격하고 이를 반복하는 관음, 혜련의 변심과 가출, 엉뚱한 방법으로 학생회장 당선, 추석에 고향에 온 혜련과의 정사, 또 떠나버리는 그녀, 아버지의 죽음, 얼마 안 되는 재산을 양조장 주인에게 모두 뺏김, 군대시절의 친구 최인구의 등장, 강도질하러 양조장에 갔다가 주인 딸 귀순을 겁탈, 그 결과 그녀와의 어쩔 수 없는 결혼, 귀순에게 물려준 여인숙에 기대어 사는 백수건달의 생활, 최인구의 꼬드김으로 그에게 돈을 빌려 신문지국장 자리를 매수, 기자 노릇을 하며 벌리는 더러운 행태, 갑자기 땅 부자가 된 유기조의 등장, 이를 이용하여 최인구와 벌이는 사기행각, 국회의원 출마, 유기조의 복상사. 출마사퇴, 결국 최인구에게 써준 차용증 때문 유치장까지 가고 지국장 자리마저 그에게 뺏김, 다시 백수가 되어 아내의 눈치나 보며 여인숙에 얼쩡대는 삶, 술 취해 갈 곳 없어 찾아든 굴다리…….
   여기까지가 주인공의 유년시절부터 굴다리에 찾아들어가게 되기까지 대충 뼈다귀만 추려본 것으로 뒤틀린 인간들의 뒤틀린 이야기가 역전으로 삽입되는 부분이다. 굴다리에서의 노숙생활의 시작은 진행되던 본 이야기와 맞물리며 그대로 소설의 클라이맥스가 된다.
   소설적 현재라는 일직선상에 끼어드는 역전은 장편소설에서 여러 개가 나타날 수 있다. 이 경우 역전들은 서로 시기가 다르게 나타나 작품자체에 변화를 줘가며 동시에 사건 이해에 필요한 정보로 덧붙여질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망둥어≫에 나타나는 단 하나의 긴 역전은 소설 구조에 있어 아쉽게 생각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작가의 설득력 강한 ‘입담’은 독자가 이야기의 흐름에 몰입하는 데 지장을 초래하지는 않는다.


4.
   서울에서 목포까지는 한걸음 거리이다. 서산휴게소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한 시간 정도 달리면 금강대교가 눈앞에 보인다. 서해안고속도로 오른쪽으로 충청도 구역이 끝나는 지점에는 작지만 아담한 산이 보인다. 오성산이다. 큰 산도 아니고 이름 있는 산맥을 타고 내려온 줄기도 아니다. 하지만 나당연합군에게 백제가 멸망할 때 구국의 혼을 불살랐던 다섯 분의 묘가 정상을 지키고 있는 영산이다.
   그 오성산 자락을 타고 내려와 앉은 곳이 군산이다.

 

   소설의 도입부다. 자신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지리적 배경을 서사시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라대곤은 그의 마지막 장편소설 <유산>에서도 “둔덕리,/ 전북 무주에서 발원하여 부여를 지나 강경나루를 타고 내려온 금강 물이 서해 바다와 마주치는 곳에 웅장한 다리가 있다. 이름하여 금강 하구둑이다.”라고 같은 방식으로 글의 문을 열고 있다. 마치 채만식이 그의 대표작인 <탁류>의 모두冒頭에서 소설의 배경인 군산의 위치를 설명하고 있는 것과 흡사하다.
   장편소설에서 서사가 이루어지는 지리적 배경을 유장하게 서술함으로 글을 시작하는 것은 시빗거리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독자는 이런 배경을 통해 어떤 커다란 일이 벌어질 것이란 예감에 가슴이 설레게 된다. 동시에 독자는 자신의 얼굴을 내밀며 인생이나 사건에 대해 자기주장을 피력하는 논평적 화자의 모습을 느끼게 된다. 즉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사건진행만 충실하게 보고하는 중립적 화자가 아닌 수다스런 화자를 예감하는 것이다. 그러나 ≪망둥어≫에서 이런 예감은 오산이다.
   모든 서사문학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야기꾼, 즉 화자가 있게 마련이다. 서사문학의 원초적 상황은 “어떤 화자가 일어났던 어떤 일을 청중에게 이야기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독자에게 말을 거는 존재인 화자는 어떤 면에서 작가의 분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독자가 객관적 실체를 파악할 수 있도록 화자는 뒤로 물러나 주관적 논평을 삼가야 한다는 것이 대세다. 예술가는 인물들의 ‘재판관’이 되어서는 안 되며 공정한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화자의 중립성을 강조하고 있다.
   일견 위의 인용문은 논평적 화자의 전형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느껴지지만 독서를 계속하다 보면 주인공이 자기 이야기를 꺼내기 위한 시작의 말에 불과함을 금방 알 수 있다. 군산의 지리적 설명이 끝난 후 바로 구철도역이 소개되고 뒤이어 역사 부근의 잡풀이 무성한 굴다리가 –바로 주인공이 노숙을 시작하는- 등장하기 때문이다. 또한 주인공이 굴다리에서 노숙하기까지 역 광장에 무료급식소가 생기게 되는 이야기며 주인공이 이곳에서 설치고 다니게 되는 이야기는 나서기 좋아하는 화자가 말하는 것 같지만 이것 역시 하봉기가 본격적으로 자기 이야기를 하기 위한 사전 설명이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야 할 것 같다.”라며 급식소가 생기게 되는 원인과 과정을 얘기해주는 것을 보아도 그러하다. 한 마디로 이 소설은 주인공 하봉기가 보고 느끼고 행동하고 발언하는 ‘선택적’ 삼인칭 전지시점의 구조로 되어 있다.
   자주 얼굴을 내밀고 논평하는 화자는 소설의 전면에서 사라졌다. 다시 말하자면 화자는 제거된 것이다. 이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아닌지는 논란의 대상이 아니다. 화자는 있어도, 없어도 이는 작가의 서술적 역량에 따르는 것이지 실상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망둥어≫에서 논의 될 문제는 작가가 사건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시점’이다.
   논평적 혹은 중립적 화자에 대해 말하는 것이 화자의 ‘성격’ 문제라면 이런 저런 시점에 대해 말하는 것은 화자의 ‘시각’ 문제다. ‘무제한적’ 삼인칭 전지 시점은 작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시점이 될 것이다. 표현의 자유가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작가는 시공을 자유스럽게 넘나들며, 주인공은 물론 누구의 마음속에도 들어가 그것을 독자들에게 공개할 수 있다. 따라서 세상의 삼인칭 소설의 거의 전부가 이 시점으로 쓰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하다고 해서 이런 무제한적인 자유가 반드시 소설을 위해 좋은 효과를 주는 것은 아니다.
   ‘선택적’ 삼인칭 전지시점은 선택된 한 인물의 마음속으로만 들어갈 수 있다. ‘나’라는 일인칭의 객관적 시점과 흡사하게 한 인물이 체험하는 것만을 독자에게 알려줄 수 있음으로 화자의 초능력은 배제되고 ‘인간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게 된다. 관찰은 한정된 범위에 머물 수밖에 없으며 이는 사건을 자연스럽게 파악하도록 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 무제한적 전지시점에서 신적 능력을 발휘하던 작가는 몇 배의 고생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경우 한 인물의 지각을 통해 모든 것을 보고 듣기 때문에 소설은 놀라운 간결성과 통일성을 갖게 된다. 이런 점에서 독자들이 작가에 의해 선택된 하봉기만을 따라다니게 만드는 ≪망둥어≫는 커다란 미덕을 가지고 있다. 선택적 시점은 대개가 단편에 많고 장편에는 아주 드물다는 사실도 이를 증명한다. ≪망둥어≫가 장편소설임을 다시 유의할 필요가 있다.


5.
   한계를 가진 한 인간이 파악하는 사건은 한정된 범위를 갖게 마련이다. 이에 힘이 부치고  서투른 소설가는 통속 드라마처럼 ‘우연’을 반복하게 된다. 대개의 티브이드라마가 그렇듯 ‘우연히’ 중요한 대화를 듣거나, ‘우연히’ 중요한 일을 목격하게 만든다. 혹은 사건현장을 ‘우연히’ 지나가게 만든다. 이럴 바엔 차라리 ‘열쇠구멍으로 엿보기’가 낫다. 물론 라대곤이 티브이의 막장드라마 같은 우연한 엿듣기, 엿보기 식으로 플롯을 전개시켜 나갈 리는 없다.
   그럼에도 템포 빠른 라대곤의 소설에는 돌발적인 사건이 자주 터지고 이 의외의 사건들은 가끔 독자를 어지럽게 만든다. 개연성의 문제가 대두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문제가 되는 예를 하나만 들자. 그것은 주인공의 운명적인 사랑인 혜련이 보여주는 의외성이다.

 

   그녀가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으스러지고 있는 그믐달이 아쉬운 듯 언덕 위에서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황홀한 밤이었다. 하지만 그 황홀한 밤이 그녀와 마지막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처음이자 마지막 밤이 되고 만 것이다.
   봉기가 행복에 겨워 늦잠을 자는 사이에 혜련이는 또 거짓말처럼 홀연히 마을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꿈이라면 너무 허무하고 야속했다.

 

   혜련은 순간순간 주인공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첫사랑으로 이 소설의 여주인공이나 다름없다. 인용문은 성장한 둘이 황홀한 정사를 나누었지만 그 이튿날 정말 “거짓말처럼” 혜련이 떠나버리고 마는 대목이다. 이 ‘예측치 못한 일’은 이후 그녀가 소설의 진행에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궁금하게도 만들지만 독자들은 왜 떠나야 했는지가 당장 더 궁금하다. 삼인칭 선택적 시점에서 독자들은 주인공 하봉기의 입만을 바라보고 있다. 그의 설명에 모든 것을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봉기는 ‘미친 듯 찾아 헤매고 몸부림을 칠 뿐’ 개연적 설명을 못하고 있다. 그녀는 가난이 싫어 떠났다고 말한 바 있다. 떠난다고 부자 되나? 독자에게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파국으로 끝나는 소설의 대단원에서 여주인공은 다시 등장한다.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수면제 병을 꺼내 한꺼번에 입에 털어 넣고 나머지 소주를 마셔버렸다. 치사량의 세 배다. … 갑자기 혜련의 얼굴이 떠올랐다. … 이 세상에서 남아 있는 사람 중에서 마지막으로 보고 싶은 얼굴이다.  … 정신이 몽롱하다. 다리에 힘을 주고 마을 쪽 그녀의 집을 향해 걸었다.  … 꿈속처럼 그녀의 집이 가까워진다. 싸리 울타리까지 변한 게 없다. … 젊은이 하나가 거기 서 있다. “아니?”/ 분명히 꿈이다. 삼십 년 전 늙지 않은 자신이 거기 서있는 것이 아닌가? 이게 어찌된 일인가? 수면제를 먹어서 환각이 온 것인가? … 부엌에서 나오던 여인네와 눈이 마주쳤다./ “이럴 수가?”/ 마주친 여인도 파랗게 질리면서 굳어버렸다./ “혜련이?”/ 컥 숨이 막혀온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그녀다. 그 많은 세월이 지났는데도 둘이는 순간적으로 서로를 알아보았다.

 

   망둥이처럼 날뛰고 설치다가 모든 것을 잃고 파멸하는 주인공, 마침내 자신을 지금 꼴로 만든 친구와 아내의 정사 장면을 목격하는 주인공, 년놈이 붙어있는 여인숙에 불을 지르고 고향으로 내려가 자살을 하는 주인공. 인용문은 감성이 여린 독자라면 이 경망하고 충동적인 주인공을 위해 연민의 눈물을 글썽이게 될 유일한 대목이다.
   그러나 주인공이 지른 불은 사망자가 열 명이나 발생한 화재사건이 된다. 몇 년 전에 군산에서 실제 발생해 뉴스거리가 된 화재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김제와 군산은 지척이다. 21세기의 교통망과 통신망은 주인공이 그처럼 보고 싶어 하던 여인을 떼어 놓지 못한다. 더구나 행간에는 주인공의 30년 전의 자신, 즉 아들까지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작가는 수면제를 먹어 환각일지 모른다고 에두르지만 너무 구체적인 만남이다. 이 문제는 이 정도로 하자.
   소설가는 허구적 세계를 창조하지만 모든 사물은 크든 작든 서로 관계가 있고 앞뒤가 맞아야 한다는 점을 유념하게 된다. 심지어 환상적인 것도 그럴듯한 맥락에서 표현되어야 한다. 과학적인 엄격한 논리가 요구되는 것은 아니지만 소설을 형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그럴듯함’이다. 위의 인용문은 이런 점에서 또 하나의 문제를 야기한다.
   죽어가는 인물의 의식에 대한 묘사는 그럴듯함의 원칙에서 가장 벗어나는 것이 될 것이다. 죽기 직전의 의식은 장본인 아니면 누구도 알 수 없다. 더구나 ≪망둥어≫는 하봉기가 보고 느끼는 것만을 기록하는 선택적 시점의 소설이다. 죽어가는 그의 느낌은 작가도 화자도 알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인용문과 같은 묘사는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런 표현방법을 이해하고 허용한다. 문학이 ‘현실의 재현’이라는 문학관만을 주장한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실제로는 상상력에 의한 허구적 ‘창조의 세계’로 결코 문학은 현실의 재현만은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위와 같은 표현은 얼마든지 가능해진다. 소설의 허구세계는 작가가 창조한 ‘독립적 세계’라는 인식을 가지고 위의 인용문을 보자. 여린 감성을 가진 독자뿐 아니라 덤덤한 독자인 우리도 사랑하는 두 사람의 기구한 운명에 가슴 찡한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작가에게는 보다 많은 표현의 가능성이 허용되어야 한다. 이 문제도 이 정도로 하자.


6.
   사람이 사건을 만든다. 소설에서 전개되는 사건도 모두 등장인물을 통해서 일어난다. 소설 구성이 바로 주인물의 전기적 형식이라는 말이 있듯 등장인물은 소설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망둥어≫에서 사건을 만들어가는 인물들은 주인공이든 그가 상대하는 주변인물이든 거의 모두가 소위 삼류 따라지 인생들이다. “망둥이가 뛰니까 꼴뚜기도 뛴다.”라는 말처럼 그야말로 별 볼일 없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떨거지들이다.
   주인공은 쉽게 우쭐되는 단순하고 경박한 품성을 가진 인물이다. 하릴없이 역 앞에서 어슬렁거리던 그가 급식을 도와주다 사람들이 ‘회장’이라고 불러주자 정말 봉사회장이 된 것처럼 우쭐된다거나, 노숙자로 떨어진 그가 다른 노숙자들과 어울려 엉뚱하게 조합을 만들어 설치는 것이 이런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경우다. 그런데 모든 라대곤의 소설에는 주인공의 이런 성격을 이용해 부추김과 꾐으로 주인공을 파멸로 이끄는 강력한 적대자가 있다. ≪망둥어≫에서의 최인구 같은 놈이다. 그는 주인공의 모든 것을 빼앗고 교도소까지 가게 하는 적대자다. 결국은 주인공의 아내까지 빼앗고 마는 -그러나 사회생활에는 능란한- 교활한 적대자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라대곤의 작품들은 자전적 경험의 뼈아픈 기억과 강한 연결고리를 맺고 있다. 작가가 ‘강원도 화천’에서 군복무를 하고 있을 때 특별히 친절을 베푼 선임이 있었다. 그의 친절은 실상 작가를 보급품 횡령의 공범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것도 모르고 작가는 부화뇌동하여 그와 함께 부정을 저지르고 밤마다 술을 마셨다. 그 결과 작가는 강등 제적되어 군 생활을 마감하게 되었고 사회에 나와 시험을 볼 자격마저 박탈당하였다. 이 일은 작가에게 평생 고통을 주는 트라우마로 깊게 각인된다.
   이 장본인이 ≪망둥어≫에서의 최인구라는 안타고니스트로 나타난다. 그는 바로 ‘강원도 화천’에서 함께 근무했던 ‘군대친구’로 등장한다.

 

   서울에는 하룻밤 신세질 곳조차 없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고 있을 때 군산에 살고 있는 군대친구 최인구가 찾아왔다. 밤새워 술을 마셨다./ “군산으로 가자. 가서 함께 살자”/ 고마웠다. 집까지 김영감에게 넘어갔으니 정리할 것도 없었다. 망설이고 말 것도 없었다. 하룻밤을 자고 그 길로 따라 나서고 말았다.

 

   하봉기가 혜련을 찾아 서울에 가려 생각해 보지만, 아무 연고도 없는 서울에 무작정 찾아가 볼 수도 없어 고민하고 있을 때 구세주처럼 나타난 사람이 군대에서 함께 생활했던 최인구다. 주인공의 성격이 인용문에 그대로 나타난다. ‘망설이고 말 것’도 없이 그 이튿날 자기를 파멸로 이끌 사람을 ‘따라 나서는 것’이다. 그것도 고마워하며.
   그는 작가의 군대 선임처럼 친절하였다. 하봉기가 살아갈 길을 이것저것 알려 주었다. 그러나 그 일은 모두 제대로 된 것도 아니고 정당한 것도 아니었다. 최소한 죄의 공범자가 되게 만들든지 자기는 빠지고 하봉기가 몽땅 뒤집어쓰게 하든지 둘 중 하나의 결과가 되도록 최인구는 수완을 부렸다. 끊임없이 꼬드기며 부추겼다. 그리고 점점 주인공을 파멸의 나락으로 빠뜨려 결국은 자살을 하게 만든다. 하기야 자신도 하봉기의 아내와 벌거벗은 채 타죽고 말지만.
   라대곤이 내면적으로 피를 흘려야 했던 아픈 시간의 흔적들은 자신의 삶의 양태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게 만들기도 한다. 작가는 한때 봉급도 없는 명색뿐인 기자생활을 잠시(1965) 한 적이 있다. 이때의 체험이 ≪망둥어≫에 고스란히 구체화된다.
   지방 주재기자의 눈살 찌푸려지는 행태들이 여실하게 형상화되는데 우선 지국장 자리를 따는 것부터가 그러하다. ‘신문의 신 자도 모르는 사람’에게도 보증금 200만 원에 신문 300부만 보급하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막말로 계약부수 300을 몽땅 휴지해도 시비할 사람이 없는 겁니다.” … “본사에다 매월 50부 값만 발송하면 됩니다. 왜냐하면 나머지 250부는 지국의 수입금으로 먹고살라고 주는 돈입니다. 그까짓 50부 값이 얼마나 됩니까? 겨우 술 한 잔 값이지요. 공짜로 던져주는 겁니다.”/ “본사는 뭘 먹고?”/ “신문 몇 부라도 나가는 지국이 있으면 광고가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위의 대목에서 세태의 모순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혹한 주인공은 아내 몰래 최인구에게 돈을 빌려 지국장 자리를 말 그대로 ‘산’다. 돈 주고 산 ‘자리’지만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우선 동네 파출소장의 태도가 달라진다. “파출소에서 봐주는 여인숙이라고 소문이 나면서 눈에 띄게 장사도 잘되었다.” 생각지도 않은 돈 봉투를 찔러 넣어주는 사람도 생겼다. 털어서 먼지 나지 않는 놈이 없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망둥어≫의 주인공은 바로 다른 인물도 아닌 안타고니스트와 어울려 모순 속의 현대사회를 유영한다. 예로 비밀 댄스를 추던 유부녀를 협박하고 공갈치고 돈을 갈취하고 겁탈한다. 그리고 그들은 작가가 그랬듯 보급품을 빼돌려 “강원도 화천에서 마시던 기분으로” 술잔을 나누는 것이다.
   이 외에도 프로타고니스트와 안타고니스트는 사이 좋게 여러 지저분한 행태를 벌리지만 유기조를 상대로 사기행각을 벌이다 결국 “사건이 터지면 몽땅 밀어붙이고 저는 발뺌을 해서 먼저 도망”가는 최인구는 빠져나가고 주인공은 징역살이를 하게 된다. 이후 하봉기가 노숙자가 되고 이는 소설의 정점이 된다. 그리고 소설은 죽음의 파국으로 대단원을 향해 치닫게 되는 것이다.
   작중인물과 라대곤의 아픈 체험과의 연관을 두 가지만 집중해 보았다. 하나는 최인구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적대자와의 관계다. 또 하나는 지방 주재 ‘기자’라는 직업에 대한 작가의 강한 거부감이다. 이는 자신이 체험한 삶의 양태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다. 이 외에도 많은 인물들이 ≪망둥어≫에서 망둥이처럼 이리저리 뛰고 있다.


7.
   라대곤은 자신의 정신적 외상을 특유의 풍자적 문체로 통렬하게 ≪망둥어≫에 쏟아냈다. 그는 소설 속에 빗대고 있는 망둥이를 통하여 자신의 성격의 결함을 토로하는 동시에 비틀린 세상을 향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주인공 하봉기의 태몽은 ‘망둥이가 치마폭으로 뛰어 오르는 것’이었다. 청운사의 스님은 “망둥어처럼 제법 팔딱거릴 놈”이니 잘 키우라고 덕담을 해 주었다. 그러나 실상 망둥이는 겨우 한해살이로 먼 바다까지 헤엄쳐 나갈 수도 없는 놈이다. 서해바다의 뻘 속에서 폴짝거리는 놈일 뿐이다. 맛이 없어 시장의 좌판에도 오르지 못하는 놈이다. 식당의 메뉴에도 없는 놈이다.

 

   오죽하면 어리석기가 눈먼 망둥어라고 했을까. 어부가 아닌 아마추어 낚시꾼의 보잘것없는 미끼에도 쉽게 걸려오는 것은 그만두고, 낚시에 걸린 다른 놈 꽁무니까지 물고도 따라 올라오는 것이 망둥어이다. … 욕심은 많아서 제 살 찢어 미끼로 끼워도 사정없이 물고 늘어져 자살하듯 버둥거리는 모습이 애처롭다. 멍청해서 별 볼일 없이 살다가 허망하게 가버리는 놈이다.

 

   주인공 하봉기는 최인구의 ‘보잘것없는 미끼’라도 언제나 쉽게 무는 어리석은 망둥이다. 스님 말마따나 ‘제법 팔딱거릴 놈’이긴 했지만 파국을 만나고 마는 사람이다. 작가가 자신의 결함을 아프게 토로하는 대목이다. 인용문은 인간의 끊임없는 탐욕에 대해서도 질타하고 있다. 그 탐욕의 끝은 결국 “별 볼일 없이” 허망하게 가는 것이다.
   문학이 가진 강한 전이轉移력은 사회나 인간의 상호연관성을 빠르게 인식하게 한다. 우리와 동시대를 함께 살았고 살아가고 있는 인간군의 삶의 현장과 그곳에서의 아픔을 우리의 체험으로 공유하게 한다. 소설은 그 자체가 치열한 삶의 현장이다. 우리는 독서를 통해 소설에 수용된 현실과 맞부딪치게 되고 이 현실을 소설이란 변증의 방법으로 총체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라대곤은 “시대의 분노와 아픔을 고발하는 책임감 있는 소설을 한 편쯤은 써야 한다고 생각”(≪유산≫, 작가의 말)해 왔다. 그러나 같은 글에서 그는 “남을 선도하고 깨치는 글은 애초부터 쓸 터수”가 못 된다고 한탄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단지 겸양의 말에 불과하다. 그는 성공적으로 자신이 원한 목표에 부응했다. 그는 욕망으로 점철된 삶의 현장에 우리 손을 이끌고 가 그것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과연 인간과 세계의 관계는 무엇인지,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어떠한 것인지 우리에게 묻고 있다. 라대곤은 같은 글에서 자신의 작품을 “철학이나 이념을 떠나서 소설의 재미로만 읽어 주었으면”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역으로 ‘소설의 재미’를 떠나서 ‘철학이나 이념의’ 아픔이 소설을 읽고 난 후 묵직한 통증으로 남게 되는 것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호병탁  ------------------------------------------------
   부여 출생,  ≪표현≫으로 등단,  시집: ≪칠산주막≫, 평론집: ≪나비의 궤적≫ 등, 한국외국어대와 원광대대학원에서 어학·문학전공(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