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 날들을 되돌아보면 주로 앞장서기를 좋아해 온 날들이었다. 누군가의 뒤에서 조용히 지내온 적이 별로 없었다. 주도하려 하고 주인공으로 드러내고자 했다. 자발적이지 않고 타의에 의해 움직이는 것을 거북해했다. 그래서 주도권을 잡지 못하면 외면하거나 방관자가 되는 것으로 불편한 심기 표시를 대신했다."
안개꽃 - 권오훈
동인지 출판기념회 행사에 꽃바구니가 배달되었다. 연노랑 장미꽃이 희고 자잘한 안개꽃 사이사이에 꽂혀있다. 축하행사에 걸맞게 현란하고 자극적인 화사함을 기대했던 나는 꽃바구니가 너무 밋밋하다며 불평했다.
장미나 국화는 한 송이만으로도 돋보인다. 한 묶음의 꽃을 들고 가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까지도 화사해 보인다. 개나리만 해도 꽃송이는 크지 않지만 눈에 확 띄는 노란색으로 봄의 전령사 역할을 톡톡히 해내지 않는가. 콩알같이 자디잔 꽃송이가 그것도 띄엄띄엄 달려있는 안개꽃은 왠지 미미해 보인다. 가늘고 긴 줄기는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아 안쓰러워 보인다. 이 꽃의 존재 의미는 다른 꽃들 틈을 메워 그것들을 돋보이게 하고 보완해주는 데 있는 것 같다.
내가 합창단에 들어간 것은 다분히 즉흥적이 면이 있었다. 딸 결혼식에 주례를 섰던 L 교수 부부와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였다. 근황을 묻자 합창단을 만들어 일주일에 한 번씩 노래하는데 한 주간의 스트레스가 확 달아난다고 했다. 나도 해볼까 했더니 그가 강권했고 얼떨결에 수락했다.
노래는 좋아하지만 음역이 좁아서 고음도 저음도 힘들다. 노래방에 가면 높은 음역까지 거침없이 넘나드는 동생이 부러웠다. 지난해 <남자의 자격>이라는 예능프로그램에서 합창단을 구성하는 과정을 흥미롭게 보아온 터라 구미가 당겼다.
악보도 읽을 줄 모르는 백지상태라며 인사말을 하자 지휘자 선생님은 가공되지 않은 원석이라며 환영해 주었다. 합창이란 빼어난 음색으로 선도하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묻혀가는 목소리와 숨어가는 목소리도 어우러져야 진정한 하모니를 이룰 수 있다는 말에 고무되었다. 무식하면 용감해진다더니 자질도 없고 오디션도 안 거친 내가 의욕만으로 합창단원이 된 것이다.
고음 부담이 적은 베이스 파트에 배정되었다. 테너 파트에서 멜로디를 부르거나 솔리스트로서 주요 소절을 부르며 각광을 받고 싶지만 언감생심이다. 목청을 돋우어 고음을 넘나드는 소프라노나 테너의 음색은 참 매력적이다. 주된 멜로디를 노래하니 다채롭고 화려하다. 알토나 베이스는 낮은 음이라 힘은 덜 들지만 멜로디를 받쳐주는 화음이나 후렴이라 단조롭다. 간혹 멜로디를 부를 때도 있고 중후한 음색이 든든하고 매력적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어느 한 파트만의 음색보다는 모든 파트가 어우러졌을 때 가장 멋진 하모니가 이루어지고 듣는 이들의 심금을 울린다는 것을 깨닫는다.
단원의 대부분이 음악을 전공했거나 성가대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다. 악보를 받으면 즉석에서 읽고 부르는 것은 기본이다. 다만 복잡한 반음 변화 등에서 지휘자가 약간씩 교정해 줄 뿐이다. 나는 학창시절 음악시간에 주입식으로 배운 짧은 음악지식이 고작이다. 악보를 읽으며 노래를 부르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옆 사람이 부르는 것을 듣고 눈치로 음감을 익혀서 따라 부른다. 삑사리를 내어 눈총을 받기도 한다. 복식호흡도 적절한 숨쉬기도 서툴러 숨이 가쁘다.
합창단 구성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관록 있는 단원들인지라 내가 소화하기에는 벅찰 정도로 많은 곡들을 연습한다. 두어 차례 복지관 봉사의 날 행사에 초청받아 공연했고 크리스마스를 앞둔 날 저녁에는 번화가 유명백화점 매장에서 플래시몹으로 <할렐루야>를 공연했다. 그것은 동영상으로 찍혀 유-튜브에도 올랐다. 그 동영상을 카톡으로, 또는 스크랩하여 가입한 카페에 퍼다 나르며 지인들에게 자랑했다. 정작 나는 실수할까봐 뒤편에 숨어 있어서 한 번도 클로즈업되지 않았다. 동영상을 볼 때마다 앞줄로 나서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다. 뒷줄에 선 모습이라도 찾아보라고 강요했다. 그럴듯한 역할로 활약하는 모습을 자랑하고 싶었지만 욕심이었다.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보면 주로 앞장서기를 좋아해 온 날들이었다. 누군가의 뒤에서 조용히 지내온 적이 별로 없었다. 주도하려 하고 주인공으로 드러내고자 했다. 자발적이지 않고 타의에 의해 움직이는 것을 거북해했다. 그래서 주도권을 잡지 못하면 외면하거나 방관자가 되는 것으로 불편한 심기 표시를 대신했다.
청춘합창단의 이경규와 김국진을 떠올렸다. 그들 역시 합창단에서의 비중은 나와 별반 다름없이 음역이나 노래실력만큼 미미했다. 그러나 프로그램의 주역이고 인기 연예인인 만큼 다른 역할들로 존재감을 과시했다. 우리 합창단에서는 그런 역할을 할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 어떤 역할로 존재감을 드러낼까? 묻혀가는 음색에도 못 미친다. 숨어가는 음색이지만 그것이 있어 드러나는 음색이 더욱 빛을 발하지 않을까. 오케스트라의 각종 악기들이 제각각의 소리로 화음을 이루듯, 각자의 숨겨진 음색들이 어우러져 화음을 이룰 때 진정한 합창이 되는 것이리라.
“어머, 안개꽃이네! 향기도 그윽하고 분위기 있는 꽃바구니네요.”라며 반색하는 여성회원들의 찬사에 머쓱해졌다. 품격 있는 문학행사에 딱 어울린단다. 그렇게 보니 꽃바구니는 단아하면서도 우아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 같다. 주화主花인 장미뿐 아니라 보조화인 안개꽃에 관심을 갖는 이도 있구나.
권오훈 ---------------------------------------
≪수필과비평≫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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