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4막의 무대에 서서 붉은 드레스를 입고 홀로 탱고를 추고 있다. 고독한 내 허리에 휘감긴 반도네온의 파르스름한 B플랫의 음률을 당기며 한 순간도 멈출 수 없는 고독을 느낀다. 춤을 추는 동안은 끝없이 한없이 풀려 나오는 줄을 염원하면서 망망한 바다를 그리며 발을 옮긴다. 어설프고 하찮은 내 무도를 보면서 관객들은 속으로 얼마나 웃고 있을까. 이 아슬아슬한 곡예사를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그도 줄당김을 사뭇 망설이고 있을 것이다. 내가 저 푸른 대지를 봄바람처럼 팔랑팔랑 날아가길 기대하면서."
곡예사의 춤 - 정영숙
여행에서 돌아와 지나간 시간을 다시 읽는다. 일행과 함께 일본 아소 사루마와시 공원에 갔다. 일본인들은 원숭이 쇼를 재미있어 한다더니 부채꼴 모양의 공연장에 사람들이 붐볐다.
젊은 남자광대가 원숭이 한 마리를 앞세우고 나왔다. 관객들이 요란한 소리를 지르며 박수를 친다. 그는 황금색 무대복에 까만 벨트로 멋을 내고 이마엔 색색으로 꼬아 만든 띠를 둘렀다. 원숭이도 사람인 양 짧은 티와 반바지를 입었다. 그가 큰소리로 인사말을 하자 원숭이는 머리가 땅에 닿도록 허리를 숙인다. 분위기를 띄우려는 듯 그의 말은 수다스럽고 동작은 허풍스럽다. 그러나 그의 말이 현란할수록 원숭이는 무심하다. 표정이 없다.
뒤이어 빨간색 초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가 쬐끄만 원숭이를 데리고 나왔다. 꼬마원숭이도 무늬가 있는 빨간색의 티와 앙증맞은 바지를 입었다. 차렷 자세로 서 있는 모습이 귀여웠다. 여자광대가 말을 하는 동안 뽀시락 장난질 치는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고 손으로 옷자락을 만지작거린다. 그러면 여자는 사정없이 꼬마의 팔을 친다. 원숭이는 흠칫하며 긴장한다. 두 광대는 서로 자기의 원숭이가 곡예를 더 잘하노라고 거만하게 자랑을 했다.
큰 원숭이가 산책을 한다. 거들먹거리는 인간처럼 뒷짐을 지고 배를 쑥 내민 채 무대를 빙빙 뚜벅걸음을 걷는다. 질세라, 그 흉내를 내며 꼬마 원숭이가 따라간다. 물구나무서기를 한다. 공을 굴리며 무대를 돈다. 네모난 장애물을 일렬로 세워 놓고 누가 더 빨리 더 멀리 뛰어넘나 경쟁을 한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공을 뒷발 사이에 끼우고 장애물을 돌기도 하고 폴짝폴짝 뛰어넘기도 한다. 죽마를 탄다. 사람 키로 서너 길은 넘어 보이는 죽마에 올라 성큼성큼 걷기 경쟁을 한다.
남자광대의 구령에 맞춰 음악이 흘러나오고 관중은 박자 맞춰 손뼉을 치고 원숭이는 열심히 재주를 피운다. 한 공연이 끝날 때마다 사람들은 요란하게 환호성을 질렀다.
나는 두 원숭이의 재롱이 그다지 재미있지 않았다. 자꾸만 눈이 다른 데로 갔던 것이다. 원숭이 목에는 줄이 걸려 있었는데 그 줄은 광대가 쥐고 있었다. 줄은 원숭이가 재주를 부릴 만큼만 늦추어 주었다. 좀 잘못하는 듯하면 번개같이 잡아챘다. 원숭이의 목에 전달되는 그 동작은 얼마나 냉정할 것인가. 한 토막 재주가 끝날 때마다 줄은 사정없이 짧아진다. 원숭이는 끌려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한사코 밖으로 나가려 한다. 그러나 뒷걸음으로 끌려가고 만다.
줄을 풀었다 당겼다 조종되는 원숭이를 보면서 나도 저 원숭이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이지 않는 줄에 매여서, 박수쳐 주는 관객도 없는 무대에 서 있는 게 다르다면 다를까. 이제 타성에 빠져서 아무 감정도 없이 무덤덤해져 버려 늘 망각상태에 있는 것이다.
쇼를 끝내고 기운 없이 서 있는 원숭이를 바라보았다. 곡예사의 운명을 끊고 밖으로 가고 싶어하던 모습이 처연하다. 그에게도 잊을 수 없는 그리움이 있을 것이다. 줄이 목에 감기기 전에 살았던 저 광활한 초원과 숲이. 거기엔 가족이 있고 자유와 행복이 있을 것이다. 희미한 인조조명의 무대가 아니라 찬란한 태양이 빛나는 광막한 무대가 있는 것이다.
광대가 인사말을 할 때 갑자기 원숭이가 객석을 향해 킥킥킥 웃음을 던졌다. 그 웃음이 어쩐지 애슬펐다. 제 연기에 박장대소하는 인간들이 가소로웠을까. 하기 싫어도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자조일까. 인간들인들 저희들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던지는 비웃음인가. 아니, 타의에 의해 좌절되는 스스로의 꿈을 그렇게 킥킥거려 보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그것은 웃음이 아니라 곡예하는 자만의 울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산 너머 행복을 찾아가는 ‘붓세’처럼 우리는 끝없이 새로운 하늘을 갈망한다. 한데 시험에 떨어지고 병을 앓고 교통사고를 당하고, 인간이 겪는 그런 재앙은 허락 안 된 짓을 하다가 팔을 얻어맞는 저 어린 원숭이처럼 한눈 판 잘못으로 받는 줄 당김인가. 기쁘게도 했다가 슬프게도 했다가, 내 희로애락의 줄을 당겼다 풀었다 하는 걸 보면 아마도 그는 사람을 곡예사로 놀리는 데 재미 붙인 장난꾸러긴가 보다. 하지만 어쩌랴.
지금 나는 4막의 무대에 서서 붉은 드레스를 입고 홀로 탱고를 추고 있다. 고독한 내 허리에 휘감긴 반도네온의 파르스름한 B플랫의 음률을 당기며 한 순간도 멈출 수 없는 고독을 느낀다. 춤을 추는 동안은 끝없이 한없이 풀려 나오는 줄을 염원하면서 망망한 바다를 그리며 발을 옮긴다. 어설프고 하찮은 내 무도를 보면서 관객들은 속으로 얼마나 웃고 있을까. 이 아슬아슬한 곡예사를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그도 줄당김을 사뭇 망설이고 있을 것이다. 내가 저 푸른 대지를 봄바람처럼 팔랑팔랑 날아가길 기대하면서.
정영숙 ----------------------------------------
≪수필과비평≫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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