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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3년 6월호, 사색의 창] 멸치 - 이동이

신아미디어 2013. 7. 25. 14:03

"상자 속 자존의 한 덩이를 자근자근 씹는다. 으스러지면서 내뿜는 그 맛에 청정한 바다의 향이 배어있다. 가없는 자유를 누리며 제 꿈을 한껏 키웠음이 참으로 가상하다. 꽃씨가 바람을 기다리듯 제 가치가 격상되기를 무던히 기다렸겠다. 안이하게 살고 있는 나는 과연 얼마만큼의 치열함과 확고한 의지를 펼칠 수 있을까. 그리하여 누구에게나 기억되고, 기쁨이 되고, 가치 있는 존재가 되고 싶건만 그 소망은 요원한 것일까."

 

 

 

 

 

 멸치    -  이동이


   상자를 열자 은빛이 쏟아진다. 가지런하기가 잔잔한 바다의 물결 같다. 손끝이 닿기만 해도 ‘톡’ 튀어 오를 듯 신선하다. 눈알도 또록또록하고 손상된 것 하나 없이 때깔이 곱다. 한 마리를 통째 먹어본다. 씹을수록 고소하고 담백하다. 겉포장을 찬찬히 살펴보니 그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죽방멸치이다. 품새가 어찌나 반듯한지 참으로 이름값 한번 제대로 한다 싶다.
   언젠가 남해에 갔을 때 대나무로 만든 말뚝이 부채꼴 모양으로 바다에 박혀있는 것을 보았다. 그 주위로 어민들 몇이서 대나무 그물망에 갇힌 멸치를 그물로 잡아, 뜰채로 건져내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죽방멸치는 세찬 조류를 따라다니다 자연스럽게 죽방렴으로 들어온 멸치를 일컫는다.
   지금처럼 그물 질이나 다양한 어로산업이 발달되지 못했던 시대에 들물 날물의 편차가 큰 지역에서 품질 좋은 생선을 잡던 어로 행위이니, 죽방렴으로 잡은 멸치의 육질이 얼마나 좋으면 멸치 중의 귀족이라 명할까.
   어민들의 집 주변 곳곳에 갓 삶아 낸 멸치가 산대미*마다 가득 널브러져 있었다. 그것들은 태양열과 해풍에 가슬가슬 몸피를 줄이며 바깥의 둘레를 넓혀갔다. 체온에 맞는 물을 따라 해류를 이동해 가던 생존의 의지와 약육강식의 사슬에서 비껴나기 위한 치열성도 뼛속 깊이 쟁여 넣고 있었다. 전 생을 담아낸 그 맛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을 듯했다.
   그래서일까, 굳이 죽방멸치가 아니더라도 멸치를 대함에 있어서 한 점이라도 허투루 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음식 중 최고의 반열에 올려두어 항시 우대하였다. 칼슘 성분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서 성장기에는 물론이고 학창시절 도시락 반찬으로는 단연 으뜸으로 쳤다.
   햇빛과 선선한 바람으로 고들고들하게 말려진 그것은 심심풀이 주전부리로도 안성맞춤이었다. 특히 고추장과는 환상적인 짝으로 자주 등장했다. 게다가 어르신들 술잔 기울이는 곁에 다소곳이 앉아 시름을 달래주기도 했으니 멸치를 대하는 애정은 각별했다. 여행을 떠날 때는 한 줌이라도 챙겨야만 서운함이 덜했다. 다방면으로 두루 쓰이며 맛 또한 좋으니 일품 죽방멸치는 오죽하랴. 그러고 보면 유달리 멸치를 좋아하게 된 동기가 있었다.
   유년 시절 선창가를 들렀다 오시던 아버지의 손에는 항상 비닐봉지가 들려있었다. 비릿한 냄새는 연신 그것에서 풍겼다. 그 냄새가 싫어 멀찌감치 서서 힐긋거리기만 했다. 생멸치를 한 손으로 꽁지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쭉 훑으면, 내장과 대가리가 말끔히 빠져나갔다. 아버지의 민첩하고도 기발한 솜씨가 신기했다. 호기심 어린 마음에 천천히 아버지 곁으로 다가서니 불쑥 초고추장 찍은 멸치 한 점을 입으로 밀어 넣어줘 엉겁결에 먹어버렸다. 그런데 그 비린 것이 내 혀를 녹일 줄 어찌 상상이나 했을까.
   그 후 아버지 손에 비닐봉지가 들려진 것을 보기만 하면 냅다 부엌으로 뛰어가 솔가지를 마개로 한 유리댓병부터 가지고 나왔다. 멸치의 깊은 맛을 더한층 돋우어 주는 것은 몇 달간 숙성된 막걸리식초만 한 게 없었다. 커다란 양푼에 무채와 생멸치를 넣고 초고추장으로 버무리면 맛이 정말 기가 막혔다. 혀끝에 남는 고소함은 그 어떤 맛과도 비견될 수 없었다.
   넉넉한 양일 때는 솥에 삶아 소쿠리에 널어 두었다가 국이나 찌개의 깊은 맛을 내는 다시용으로 썼다. 적당히 말려진 멸치는 배를 가른 후 뼈와 내장을 발라냈다. 그럴 때마다 미세한 가시가 성가시게 손을 찔렀다. 육안으로 도무지 보이지 않던 가시는 햇볕바라기를 하면 겨우 찾아낼 수 있었다. 보이지 않고서도 따끔한 침을 놓는 것은 멸치의 자존이었을까.
   상자 속 자존의 한 덩이를 자근자근 씹는다. 으스러지면서 내뿜는 그 맛에 청정한 바다의 향이 배어있다. 가없는 자유를 누리며 제 꿈을 한껏 키웠음이 참으로 가상하다. 꽃씨가 바람을 기다리듯 제 가치가 격상되기를 무던히 기다렸겠다.
   안이하게 살고 있는 나는 과연 얼마만큼의 치열함과 확고한 의지를 펼칠 수 있을까. 그리하여 누구에게나 기억되고, 기쁨이 되고, 가치 있는 존재가 되고 싶건만 그 소망은 요원한 것일까.
   오늘따라 멸치의 명성이 부럽다.

 

* 산대미: ‘삼태기’의 방언.

 

 

이동이  --------------------------------------------
   ≪수필과비평≫ 등단. 수필집: ≪바람개비의 갈망≫. 2008년 ≪경남문학≫ 우수작품집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