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색한 젊음에 자신을 묻고 배회하던 기억들이 좌판 위의 백열등을 따라 일렁인다. 금방이라도 그 시절이 달려올 것만 같다. 노선이 동해와 연결되어 여름철이면 피서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지. 그 속 어딘가에 우리의 뜨거운 청춘도 있으련만 이제는 다만 추억하고 그리워할밖에 없는 나이가 됐다. 오늘 이곳으로 불러낸 친구의 마음을 이제야 알 것 같다. "
외출 - 윤애자
사월도 중순이건만 옷장엔 겨울옷이 그대로다. 밤낮의 기온차가 심한것인지 나만 유독 추위를 타는 것인지, 정리 안 된 옷장처럼 마음이 어수선한 날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버스 편으로 봄나물 몇 가지를 부칠 테니 저녁 시간을 비워 놓으라는 것이다. 철철이 애써 수확한 과일이며 푸성귀를 담은 택배로 소식을 대신하더니 오늘은 정류장으로 직접 나가 찾으란다. 몇 번씩이나 버스 도착 시간과 차량 번호, 기사아저씨의 휴대폰 번호를 일러주는 그녀의 목소리에 봄물이 들었다.
추억조차 일상에 묻혀버린 시간이 얼마였던가. 동부정류장이라는 말에 감회가 새롭다. 서둘러 저녁 설거지를 끝냈다. 동행하겠다는 남편을 두고 혼자 집을 나섰다. 늦은 시간이라 길도 한산하겠지만 신천대로를 이용하면 금방 다녀올 거리다. 강변을 따라 펼쳐진 야경을 혼자 느긋하게 즐기고 싶은 마음도 있다. 안에서 바라볼 때와는 달리 어둠은 발을 들여놓자 아늑하다. 오디오를 켜고 음색이 짙은 노래에다 볼륨을 높인다.
신천교에서 내려 턴을 했다. 얼마 안 가니 그 위용도 자랑스러운 동대구역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역사의 화려한 불빛과 형형색색의 네온사인과 사람들로 북적인다. 대구의 관문답게 휘황찬란하다. 동대구역을 지나 오르막에서 우회전을 하자 뜻밖에도 시야가 좁아진다. 을씨년스러우리만치 휑하다. 낯선 세계에 온 듯 어둡고 썰렁한 느낌이 지나온 길 때문만은 아니리라. 한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고 떠나간 곳인가. 내 기억 한 자락에도 불야성을 이루다시피 북적대고 활기가 넘치던 곳이었다. 간신히 입구를 찾아 경적을 울리자 졸고 있던 바리게이트 길을 터준다.
삼십여 년 전에는 이곳이 포항과 대구를 오가는 유일한 관문이었다. 지난 하릴없던 시절, 내 삶의 탈출구요 숨구멍이었기도 한. 포항으로 취직해 간 그녀와 만나기 위해 일주일이 멀다 하고 이곳을 찾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려가고 오던 그 길에 동부정류장이 있었다. 떠나고 싶을 때 갈 곳이 있다는 것은 눈물 나게 고마운 일이다. 그때 나는 백수였고 친구는 직장을 다니고 있었으니 내가 포항으로 가는 일이 더 많았다. 주인 없는 자취방을 혼자 뒹굴거나 비릿한 바다냄새에 시간을 절이다 오는 게 대부분이었지만 그땐 그곳이 유일하게 갈 곳이었다.
열쇠는 거기에 있어. 꼭 밥 챙겨먹고, 마치는 대로 올게. 언니 같은 그녀의 살가운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생생하다. 돌아보면 그땐 왜 그리도 세상이 막막했던지, 궁상스러우리만치 외로움을 잘 타는 나와는 달리 친구는 밝고 시원시원한 성격이었다. 내가 진학문제로 낙심하고 있을 때 그녀는 혼자 힘으로 학업을 마치고 포항에 있는 병원에 취직까지 했다. 이삼 년, 그녀의 순탄한 직장생활과 동부정류장을 거점으로 오가던 우리의 만남은 그녀의 결혼으로 시들해졌다. 그녀답게 좋은 직장 미련 없이 버리고 한 남자를 만나 기꺼이 시골로 들어갔다. 홀시아버지 모시고 아들딸 넷이나 낳고 농사지으며 살아도 행복하다던 그녀였다.
친구가 일러준 버스가 도착하려면 아직 30여 분이 남았다. 간간히 오가던 발길마저 뜸해지고 사방은 쥐 죽은 듯 고요하다. 잠시 후, 시내버스 한 대가 올라오더니 느리게 정차한다. 더 이상 타고 내리는 이 없는 문으로 하루가 닫힌다. 공연한 설움이 밀려온다. 천천히 대합실이 있는 건물로 향했다. 오랜 지기를 만나러 가듯 가슴이 콩닥거린다. 시간이 정지되기는 건물 안도 마찬가지다. 밖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데 군데군데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 바깥과는 유리된 세상처럼 시차마저 다르게 느껴져 한밤중 같다. 매표소와 식당은 문을 닫았고 매점 한곳이 불침번을 서듯 불을 밝히고 있다. 김밥이며 어묵이란 입간판 사이로 패스트푸드점 하나가 이방인처럼 낯설다.
옹색한 젊음에 자신을 묻고 배회하던 기억들이 좌판 위의 백열등을 따라 일렁인다. 금방이라도 그 시절이 달려올 것만 같다. 노선이 동해와 연결되어 여름철이면 피서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지. 그 속 어딘가에 우리의 뜨거운 청춘도 있으련만 이제는 다만 추억하고 그리워할밖에 없는 나이가 됐다. 오늘 이곳으로 불러낸 친구의 마음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내 모습이 생소했던지 매점 아저씨가 힐끔거린다. ‘따끈한 원두커피’라는 문구가 새삼 반갑다. 주문을 하자 그가 더 반색을 한다.
“아, 옛날엔 좋았죠. 벅적벅적허니 장사도 잘되고, 지금은 도통 사람이 없어……. 막차 기다리시나 보죠?”
다 어디로 갔을까. 사람도 세월도.
한줄기 불빛에 시야가 환해진다. 버스 한 대가 올라오고 있다. 문이 열리자 몇 안 되는 승객이 부스스한 모습으로 내린다. 승객들과 일일이 인사를 주고받는 기사아저씨와 눈을 맞추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누군가 안에서 두 팔을 활짝 벌린 채 걸어 나오고 있다. 세상에, 그녀다. 얼마 만인가. 놀랍고 반가움에 눈물이 앞선다. 꼭 십 년 만의 외출이란다. 시아버지 돌아가시고 큰아이 군에 보내고.
윤애자 -----------------------------------------------------
≪문학미디어≫로 등단. 대구문학협회, 대구수필가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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