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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3년 6월호, 나의 대표작] 진실과 정답 - 김 용 순

신아미디어 2013. 7. 16. 08:18

"세상에는 그런 우문에 대한 오답이 정답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리에 맞지 않아도 우격다짐으로 정답을 정해 놓고 묻는 권력형 우문이 있는가 하면 정답이 아예 없는데 억지로 정답을 만들어서 답하게 하는 모사꾼의 우문도 있다. 답하는 사람들도 그렇다. 정답은 내 안에 따로 두고 이리저리 눈치 보면서 유리한 쪽으로 답을 말하는가 하면 정답을 모르면서 다수를 따라 답을 말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야만 남만큼 실속을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물길 따라 가야 할 배가 산길로 간다는 말은 그래서 나오지 않았던가."

 

 

 

 

 진실과 정답    -  김 용 순


   사무실 문을 여니 실내에 웃음이 가득했다. 창가에 하얀 용담꽃에서 피어나는 웃음이다. 낙엽이 다 지도록 새치름히 입을 다물고 있다가 서릿바람과 함께 한 송이가 피어서 적적한 공간을 가득 채웠다. 대부분의 용담꽃은 쪽빛인데 이건 잡티 하나 없는 순백색이다. 국화처럼 화려하지도 않고 도라지꽃보다도 작은 홑겹에 통꽃이다. 고향 뒷산에는 이런 꽃이 들국화와 함께 어우러져 피었다. 꽃을 들여다보노라면 그 안에서 그때 그 사람들의 얼굴이 동화처럼 피어났다.
   꽃송이에서 하나하나 웃으며 나오는 고향 친구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혼자 웃고 있는데, 아이들이 들어오더니 꽃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알고자 해서 묻는 게 아니고 까마득한 고향 뒷산에서 산책하고 있는 내 의식을 저희들에게 끌어가자는 속내였을 게다. 둘러선 아이들의 얼굴을 더듬어가던 나는 경민이하고 눈을 맞추었다. 그날도 친구들의 울타리 밖에서 손가락을 입에 물고 서 있었다.
   “어, 돼지 왔네.”
   아이들의 말은 며칠 만에 만났다는 반가움이 아니고 사무실에 들어와서는 안 될, 진짜 돼지가 들어왔다는 놀라움의 표현처럼 들렸다. 어째서 ‘돼지’라고 부르는지는 모르지만 아이는 별명대로 돼지 취급을 받는다. 그러한 경민이 또한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던지 고개를 숙이고 사무실 밖으로 나가는 것을 안쓰러워서 뒤쫓아 나가자, 복도 끝에서 돌아서더니 느닷없는 말을 했다.
   “우리 할아버지 농약 먹고 돌아가셨어요. 사람들은 죽은 줄도 몰랐대요.”
   그동안의 결석 사유를 그런 식으로 밝혔다. 그런 상처를 안고 있는 아이에게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는 친구들은 ‘돼지 왔다.’는 인사가 고작이었다.
   그 상처를 덧들이는 또 한 사람, 경민이를 맡은 담임선생님이었다. 담임선생님은 그동안에 못한 것 보충해야 한다고, 아이의 손목을 잡고 강의실로 들어갔다. 저의 엄마가 일터에서 돌아올 때까지 데리고 있어야 하는 아이다. 학원에 처음 등록하러 왔을 때 아이 엄마가 그랬다. 학원에서 무엇을 가르치며 어떻게 가르치는지 묻는 게 아니고 몇 시까지 맡길 수 있느냐는 말부터 앞세웠다. 빈집에 아이 혼자 있는 게 불안해서 학원에다 맡기려고 데리고 온 듯했다. 아이 또한 그냥 학원에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지 수업시간에도 먼산바라기 아니면 손장난이 고작이었다. 그러다가 쉬는 시간만 되면 가게로 달음질했다. 엄마가 아이를 떼어놓고 직장에 나가면서 안쓰러워서 용돈을 주어왔기 때문에 그런 버릇이 든 것 같았다. 아이의 입가에는 언제나 과자 부스러기 같은 것이 붙어 있다. 그래서 돼지라는 별명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이제까지 너를 도와준 친구도 없고 네가 도와준 친구도 없단 말이에요? 누구라도 하나 써 보세요. 어서.”
   “없는데 어떻게 써요?”
   “정말로 아무도 없어요?”
   옆 교실에서 경민이와 담임선생님이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들렸다. 궁금해서 들어가 보니 시험지 한 장을 가운데에 놓고 둘이서 입씨름을 하는 것이었다. 틀린 답을 공책에 열 번 쓰는 학교 숙제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담임선생님은 아이의 숙제까지 봐줘야 한다. 어깨너머로 보니 틀린 문제는 “나를 도와 준 친구의 이름을 쓰세요.”와 “내가 도와 준 친구의 이름을 쓰세요.”였다. 공부하지 않고도 쓸 수 있는 문제였지만 쓰지 않아서 오답으로 처리되었다. 아이들이 끼워주지 않아서 늘 혼자서만 지내는 아이, 아이들에게 부대끼다 못해 울음을 터뜨려야만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아이인데 도와주고 도움을 받은 친구 이름을 쓰라니 답답할 일이다. 아이는 끝내 쓰지 않겠다고 버티다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 문제만 아니었다면 100점을 받을 수 있었는데 90점이었다. 그토록 산만한 아이가 그 점수를 받았다면 칭찬을 해 줘야 옳은데 벌로 틀린 문제의 정답을 열 번이나 쓰라고 했으니 화가 날 만도 하다. 거기에다 100점 받으면 엄마가 피자 사 주기로 했다고 입버릇처럼 말해 왔는데 그 두 문제 때문에 피자를 먹지 못하게 되지 않았는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것은 정답 판정을 잘못했거나 문제가 틀린 것이었다. 그런 친구가 없으면 쓰지 않아도 될 물음이 아닌가.
   침묵이 정답이 되는 경우는 없을까? 바람 따라 이리 휘고 저리 쏠리는 나뭇가지가 아니고 묵묵히 뿌리를 지키는 고목 등걸 같은 침묵, 그러한 무응답도 정답이 될 수 있다면 경민이는 100점을 받았을 텐데……. 친구가 없어서 침묵으로 답을 말했는데, 그것이 어찌 오답이란 말인가? 그것은 분명 잘못된 문제였다.
   세상에는 그런 우문에 대한 오답이 정답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리에 맞지 않아도 우격다짐으로 정답을 정해 놓고 묻는 권력형 우문이 있는가 하면 정답이 아예 없는데 억지로 정답을 만들어서 답하게 하는 모사꾼의 우문도 있다. 답하는 사람들도 그렇다. 정답은 내 안에 따로 두고 이리저리 눈치 보면서 유리한 쪽으로 답을 말하는가 하면 정답을 모르면서 다수를 따라 답을 말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야만 남만큼 실속을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물길 따라 가야 할 배가 산길로 간다는 말은 그래서 나오지 않았던가.
   거짓말로 꾸며서 받은 100점과 진실 그대로 비워 두어서 점수가 깎인 90점, 수치를 떠나서 이 둘의 가치를 물으면 누구나 후자 쪽에 무게를 얹어 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불리한 진실 그대로를 외면하고 실리적인 수치 쪽을 택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는 아이를 뒤에서 끌어안고 귀엣말로 실리적인 답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앞으로 너를 도울 테니까 너도 나를 도와주기로 하고 내 이름 써. 나를 도와준 친구에도 김용순, 내가 도와준 친구에도 김용순이라고 쓰라고. 내가 피자 사 줄게.”
   아이가 눈물을 훔치고 배시시 웃으면서 김용순이라는 이름을 썼다. 나는 그러는 아이의 얼굴을 창턱에서 웃고 있는 용담꽃송이에 담았다.
   몇 년 뒤, 서릿바람 속에 피어 있는 하얀 꽃송이를 들여다보며 나는 경민이와 이야기할 것이다, 너는 이 꽃처럼 순백 그대로 답을 쓰지 않아서 내가 너의 친구가 되었다고.

 


김용순  ----------------------------------------------
   충북 제천 출생. ≪수필과비평≫ 등단. 한국문인협회 충남지회 부회장, 천안지부 지부장. 수필과비평작가회의 사무국장. 수필집: ≪내 안에 피는 꽃들≫.

 

 

 

작가메모

   ‘나의 대표작’을 보내란다. 고르는 일이라 여전히 쉽지 않다. 아쉬운 대로 한 번 걸러진, 수필집의 작품들을 떠올리게 된다. <흉터>를 읽으며, 최근에 어머님 상을 치른 어떤 이는 울었다고 했다. 딸자식을 이국 멀리 떠나보낸 선배는 <지폐 두 장>이 ‘그중 낫다.’고 했다. 동창생 보라는 <내 소리> 때문에 한 권 더 샀다고 하고 멀리 부산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친구는 전화를 걸어와 <유리 인형>에 대한 독후감을 본문보다 더 길게 얘기했다. 읽는 이의 상황에 따라 눈에 띄는 글도 각기 다른 모양이다.
   더 어려워진다. 나를 대표할 전형적인 작품이 어떤 것일까. 우선 내 모습을 들여다본다. 낮 중 가장 긴 시간을 학생들과 지낸다. 내 의식의 희로애락 또한 그 시간의 결과물이 많다. 그렇다면 <진실과 정답>이 어떨까.
   그날도 나는 강사라는 총을 메고 성적과의 전쟁이라도 치를 각오로 강의실 문을 열었다. 지도안대로 아이들이 잘 따라와 주기를 바랐고 즐거움과 보람이라는 전리품까지 기대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옆 강의실에서 울려 퍼지는 울음소리는 패전을 예고하듯 긴장시켰다.
   외돌톨이 먹성 좋은 경민이는 피자의 유혹을 망설임 없이 물리치고 소신껏 90점을 받았다. 그런데 100점을 위해 거짓으로 답으로 고쳐 쓰라니 끝내 버티다가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를 달래 주러 갔던 나는 순수한 눈물 너머로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가면 같은 정답의 위선을 보았다. 가르쳐야 할 내가 오히려 배우며 부끄러웠다.
   수필을 꽃이라 친다면 내 안의 척박한 기성 의식에 순수의 눈물로 발아한 <진실과 정답>은 풀꽃 봉오리쯤 되려나. 인간학에 못 미칠지라도 일상적인 심적 나상이기에 보내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