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면서 일정한 거리두기가 필요하다는.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말라는. 그렇다면 노안老眼 역시 성가신 불청객이 아니라 신의 귀한 메신저라는 말인가?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신의 궁여지책이자 안전장치란 말인가?"
노안老眼 - 남호탁
화장실에 앉아 절망하는 것으로 나의 중년은 시작되었다. 느긋하게 변기 위에 걸터앉아 손가락에 침을 묻혀가며 신문을 뒤적이는 것인데 온통 희끄무레, 글자를 분간할 수가 없었다. 유리창에 낀 성에 탓에 아름다운 바깥 경치를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엄연히 존재하던 세계가 돌연 저만치 멀어져 간 것이다. 노안老眼. 수정체의 노화에 따른 장애현상으로 나이가 들면서 안구의 조절력이 감소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한다. 과학적인 설명이라고 하지만 영 탐탁지 않다. 유치할 정도로 단순하고 일차원적이다. 나는 의사이긴 하지만 인체는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많은 부분이 존재한다고 여겨왔다. 반찬을 집어 올리거나 기계를 조립하는 등의 기능적인 면만으로 손가락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려드는 사람들에게 나는 눈곱만치도 동의할 의사가 없다. 달을 가리키는 기능, 그러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넌지시 일러주는 보다 차원 높은 기능 또한 인체에 있음을 믿는 평소 나의 소신 때문이다. 이런 내게 노안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 영 마음에 차지 않을밖에.
나이가 들면서 글자를 가까이 하기가 쉽지 않은 것만큼이나 사람에게 다가서기가 두렵고 무섭다. 괜찮은 사람이다 싶어 선뜻 다가간 것인데, 다가서면 다가설수록 실망과 혼란만 쌓여 때늦은 발걸음을 돌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예민이니 까탈스러움이니 하는 것들과는 거리가 먼 성격이라 여겼는데, 이러다 대인기피증이라도 생기는 게 아닌지 덜컥 겁까지 나는 판이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탄식하다 불현듯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힌다. 혹시 신이 우리에게 노안老眼이라는 귀찮은 존재를 허락한 이유가……? 나이가 들면서 일정한 거리두기가 필요하다는.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말라는. 그렇다면 노안老眼 역시 성가신 불청객이 아니라 신의 귀한 메신저라는 말인가?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신의 궁여지책이자 안전장치란 말인가? 더불어 살아갈 수 밖에 없으면서도 가까이 다가가기엔 위험하고 비극적인 운명을 타고 태어난 존재가 인간이라니, 생각만으로도 몸서리쳐진다. 이런 기막힌 사연때문에 인간은 외롭고 고독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부디 한심한 중년의 허무맹랑한 망상이기를. 문득 피에르 샤를 루아 (Pierre-Charles Roy)의 시가 떠오르는 건 뭘까?
겨울은 얇은 빙판 밑으로 발을 빠지게 한다.
얼음 밑은 낭떠러지.
그대의 쾌락의 얇은 표면도 그러하니
인간들이여, 가볍게 스쳐가라. 힘껏 딛지 마라.
쾌락의 함정을 얼음 지치는 사람에 빗대어 표현한 시인데, 정녕 사람도 그런 것인가? 가볍게 스쳐가야만 하는 것인가? 글을 끼적대는 진료실 유리창 너머 겨울밤이 루아의 시만큼이나 을씨년스럽다.
남호탁 --------------------------------------
≪수필과비평≫ 등단. 신곡문학상 수상, 저서 : ≪대장항문병의 이해≫, ≪똥꼬의사≫, ≪똥꼬이야기≫, ≪수면내시경과 붕어빵≫, ≪똥은 기똥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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