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이 없는 인생은 지루할 것이다. 그렇다고 정년을 지난 이때 어 떤 것을 기다리며 살아갈 것인가. 겨울은 봄이 온다는 기다림으로 견디어 낸다고 하지만 정년을 지난 삶에는 정녕 봄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순간 한순간 시간 속에 박혀있는, 해바라기 씨 같은 고소한 알맹이를 찾아 까먹으며 남은 삶을 사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기다림을 아쉬워하지 않고 말이다."
기다림 - 임 만 빈
이제 기다림이란 단어를 내 몸에서 뱉어낼 때가 된 것 같다. 정년停年이라는 정해진 년年을 맞이하고 그 금을 뛰어넘은 이때 무엇을 더 기다리려고 목을 빼고 먼 곳을 바라보겠는가. 기다림 속에는 희망과 바람이 있다. 기쁨과 환희도 있다. 그런 것들이 숨어있지 않다면 왜 기다리겠는가. 어두운 물속에서 헤엄쳐 돌아다니는 물고기처럼, 인내하며 늘어뜨린 낚싯바늘에 걸리기를 기다리는 대어처럼, 실체를 보여주지 않으면서 기대만 부풀리고, 쉽게 먹이를 물지 않고 입질만 해서 애를 태우는, 허망한 꿈을 심어주지만 그래도 활기를 불어넣어주는, 뻥튀기 과자 같은 기다림.
언제부터 기다림이 시작되었던가? 엄마와 함께 누워 낮잠을 자다가 옆이 허전하여 문득 눈을 떴을 때, 텅 빈 앞마당에 내려앉은 밝은 빛, 고요, 뒤뜰을 돌고 앞마당을 지나 바깥마당을 울며 둘러보아도 누구 하나 보아주지 않아 우는 것이 싱거워졌을 때, 그때 문득 첫 기다림이 찾아온 것 같다. 엄마가 돌아왔을 때 “오, 내 새끼.” 하며 쓰다듬어주는 손길의 부드러움을 상상하면서.
기다림이란 아무것도 기다릴 것이 없을 때 찾아오는 것, 소 몰고 풀 뜯기며 망연히 산 너머 지나가는 구름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 순간에 문득 다시 찾아왔다. 흘러가는 저 구름만 따라가면, 어쩌면 구름이 흘러 간 곳으로만 쫓아가면, 그곳에는 어둠 속에서 유영하는 유령의 모습처럼 만들어지지는 않았지만 어떤 형체의 근사한 미래가 존재하는 것 같 았다. 마음에 꼭 드는 미래의 모습을 가슴속에 만들어 놓고 호주머니 속 호두알 주물럭거리듯 만지작거리다가 어느 날 과감하게 부모님에게 그 모습을 희미하게나마 보여드리고 황홀한 미래의 기다림을 따라 고향을 떠났다.
산 너머 흘러간 구름의 자리. 찾아간 도시의 거리와 저녁의 불빛 속에는 산골의 소년이 가슴속에 담고 만지작거리면서 기다리던 꿈은 없었다. 단지 그것들에 대한 기다림을 구체화시킬 수 있는 길이 보이는 듯도 했다. 꿈을 좇아 준비했다. 불빛을 찾아 날아들다 몸을 태우는 나방이 같은 열정으로 꿈에 대한 기다림을 좇아 몸을 태웠다. 오직 인내와 끈기 로 버텼다. 미래에 대한 황홀한 기다림을 위하여.
대학에 들어간 어느 날 이성異性에 대한 기다림이 문득 스며들었다. 기다림이 만남을 목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성의 이름은 시도 때도 없이 마음속에서 솟아올라 그녀의 주위를 맴돌게도 했다. 미래에 대한 기다림만큼이나 강렬한 힘을 가진 그것은 한때 사랑했던 죄로 기다림이란 기다란 대못을 가슴에 박아서 평생을 살아가게도 했지만,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 그것은 단순한 향을 풍기는 난초꽃을 연상시킬 뿐, 다시 만나보고 싶은 기다림을 아쉬운 추억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때, 문득 인생이란 결국 기다린다는 것으로 구성된 것이 아닐까 하는 깨달음이 왔다. 하나의 시험이 닥쳐오면, 그것만 끝나면 홀가분한 마음으로 마음껏 잠도 자고, 영화도 보고, 하고 싶은 것도 하겠다는 기다림으로 참고 견디었지만, 막상 시험을 치르고 기다리던 시간이 다가오면 새장에 갇힌 새가 갑자기 창공에 내던져진 것처럼 어쩔 줄을 모르고 미적거리다가 온통 귀중한 물건을 쓸데없이 써버린 듯한 씁쓸한 기분으로 다시 시험을 준비하고 다음의 휴식을 기다리곤 했다.
의사가 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질 줄 알았다. 의사라는 경험 없이 군의관 생활을 할 때는 제대해서 의사생활만 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만 같은 기다림이 있었다. 그러나 새로 시작한 전공의 생활은, 참말로 군의관 생활이 천국이었다는 되돌아봄만 마음속에 심어놓고, 다시 전문의만 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만 같은 기다림만 마음속에 심어 놓았다. 문득 쳇바퀴를 돌리는 다람쥐가 생각된 시기이기도 했다.
젊은 교수 시절, 체에 갇힌 다람쥐처럼 바퀴를 돌리고 돌렸다. 그때는, 모든 것이 가능해 보였고, 어떠한 것도 될 것 같은 빛나는 시기였다. 무엇인가 희미한 목표물이 보이는 듯도 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여유가 있을 때만 보이는 신기루 같은 기다림이었다. 생각할 틈도 없이 돌아가는 쳇바퀴를 돌리고 또 달렸다. 의지적으로 하는 행위가 아니라 시간표에 꽉 박힌, 수동적으로 어쩔 수 없이 살아가야 하는 삶이었다. 사는 것이 아니고 사라지고 있는 듯한 허무감이 한 번씩 가슴을 옥죄었다. 그래도 달리다 보면 어느 곳에 도착할 것이라는 기다림으로 마음을 달래기도 했다.
장년의 시절, 기다린다는 것,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하는 허무감이 솟아올랐다. 하나의 기다림이 눈앞에 다가와 맨몸을 보였을 때 나는 그것이 내 가슴속에 숨겨 놓았던 기다림의 모습은 아니라고 또 다른 어떤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림이 기다림을 불러오고, 하나의 기다림에 도달하면 또 다른 어떤 기다림을 향해 죽을힘을 다해가고 있었다. 기다림이란 쳇바퀴는 계속 돌고 나는 그 속에서 잡히지 않는 최후의 기다림을 향해 죽을힘을 다해 뛰고 있었다. 무엇을 가다리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러다가 누군가 묻는다. “정말로 기다림을 끝내기를 원합니까?” 그때 문득 깨닫는다. 그렇구나. 인생이란 허무한 기다림의 쳇바퀴로 이루어졌구나. 기다리는 것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으며, 기다림 속에 계속 남아 있을 것을 요구하는 극점에서 멈춰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삶이란 기다림을 좇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들어있는 석류 알 같은 시고 단 알맹이를 찾아 맛을 보며 즐기며 한순간 한순간을 보내는 것이라는 것 을 깨달았다.
기다림이 없는 인생은 지루할 것이다. 그렇다고 정년을 지난 이때 어떤 것을 기다리며 살아갈 것인가. 겨울은 봄이 온다는 기다림으로 견디어 낸다고 하지만 정년을 지난 삶에는 정녕 봄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순간 한순간 시간 속에 박혀있는, 해바라기 씨 같은 고소한 알맹이를 찾아 까먹으며 남은 삶을 사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기다림을 아쉬워하지 않고 말이다.
임만빈 ------------------------------------------
≪에세이문학≫ 등단, 수상: 제1회 보령의사수필문학상 은상, 제1회 대한의사협회 수필공모 우수상, 수필집: ≪선생님, 안 나아서 미안해요≫, ≪자운영, 초록의 빛깔과 향기만 남아≫, ≪나는 엉덩이를 좋아한다≫. (현) 대구 매일신문 의창(醫窓) 공동 집필 (2008 ~ 현재), (현) 계명대학교 의과대학 신경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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