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에미한테 많이 서운하게 해서… 미안한디. 이젠 에미가 풀어라!” “아니요… 어머니! 저도 잘해드리지 못했어요.” 둘이서는 아니 고부간은 한참 말없이 눈물만 적셨다. 나는 우두커니 서 있는 아들로서 정작 무슨 말을 해드려야 하나? 말없이 시간은 흘러갔다."
당신의 유산 - 김영채
중환자실이었다. 당신은 누워있다. 환한 형광 불빛 아래 무덤처럼 누워 있다. 파란 담요에 덮인 채 가끔 숨을 헐떡이다가 초점 잃은 눈동자를 느리게 껌벅인다. 인공호흡기는 깊게 콧속에 박혀 있다. 침대 위로 매달린 링거병에서 손목에 꽂힌 주사바늘로 무디게 떨어지는 방울마다 핏속에 스며들어 당신의 생명을 순간순간 이어주고 있다.
이 환자실에 자리한 당신을 시시각각 체크하는 의료기기는 묵묵히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그래프로 연결해가고 있다. 아마 마음 한구석에는 지난 삶의 자취들이 마지막 궤적처럼 아프게 그려지고 있을 것이다. 이럴 때 당신의 영혼은 살아온 궤적을 벗어난 채 다른 세계로 떠나야 하나?
이십여 일이 지나, 병세는 조금씩 좋아져 일반병실로 옮기게 되었다. 주름진 얼굴에는 어린애 같은 순박함이 배어 있다. 숨이 막혀 가슴을 움켜쥘 때마다 고통스럽던 모습도 병실을 옮긴 후 평온하게 보였다. 지병을 앓아온 ‘심장판막 폐쇄부전증’은 초라한 노파의 심장을 옥죄며 통증으로 괴롭혔다. 당신은 갈수록 쇠약해져 가냘픈 호흡으로 겨우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핏기 없는 손을 내가 가만히 어루만졌을 때 당신은 잠시 눈을 감으시다가 입을 열었다.
“니 아부지가 뵈여. 숨을 헐떡이다 운명한 모습이 선한디.”
말을 더 잇지는 않고 힘없는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어쩌면 당신은 지울 수 없는 그해를 떠올리고 있는가 보다.
냇가 빨래터에 당신이 갔을 때 이웃 아낙네들이 놀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서울서 난리가 났대야?”
“무슨 난리?”
“이북 공산당이 쳐들어 왔대야!”
당신에게 뭔가 철렁 내려앉은 불길한 예감은 찬바람이 스치듯 지나갔다. 놀란 나머지 빨던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겨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나뭇가지에 새까맣게 앉아있던 까마귀 떼가 느닷없이 홰를 치듯 날더니 요란스럽게 울어댔다. 가슴은 덜렁덜렁 방망이질을 해댔다. 마을 사람들은 겁먹은 표정으로 전쟁이 났다고 삼삼오오 모여 서로 귓속말로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해 여름 총성은 연이어 터져나갔다. 꼬리를 물고 날카롭게 터지는 소리는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초가을로 접어들어 다시 울리는 총성은 당신의 남편을 앗아갔다. 병상에 누워 보름도 못 넘기고 스물아홉에 생을 마감했다. 상흔이 남긴 아픔을 다 추스르지도 못한 채, 그 겨울 당신의 두 살배기 아들을 열병으로 또 잃었다. 시련은 슬픔보다도 당신의 눈물을 더 메마르게 했다. 어린 자식들과 살아가기 위해 강해져야 한다고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이 외아들집안 며느리로 시집와서 첫딸을 낳고 내리 두 아들을 낳자 시어머니 시집살이는 배추 순이 푹 죽듯이 잦아들었다. 남편은 결혼 후 한 해를 넘기더니 도청 소재지 관공서에 취직되어 하숙생활을 했다. 주말마다 만나는 부부로서 늘 긴장하며 서먹서먹하게 살아왔다. 둘째 애가 갓 임신되던 해에 남편은 직장에서 멀지 않은 하숙집도, 이곳 도시도 볼 겸 토요일에 오라는 연락이 왔다.
그날 한옥들이 즐비하게 들어찬 골목길 안쪽 하숙집을 찾아갔다. 반갑게 맞이한 남편과 함께 확 트인 도회길을 걸었다. 큰 건물 앞에 이르러 남편이 안내해준 극장에 처음 들어갔다. 영화를 보았으나 줄거리는 어떻게 이어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만 춤추는 무희의 영화라는 것만 어렴풋이 알았다. 아내의 표정을 읽은 남편은 웃으며 영화에 대해 들려주었다.
“영화는 세계적 무희 ‘최승희’의 젊은 시절 뛰어난 무용가로 성장하는 줄거리였네. 초립동, 보살춤, 칼춤도 잘 추었지. 참! 동경서 공부하던 때에 이 영화 <반도의 무희>를 정말 보고 싶었는디. 여보, 함께 봤네 그려.”
부부는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밤길 따라 하숙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 당신은 가물거리는 지난 일들을 떠올리기도 쉽지 않다. 다만, 짧은 결혼생활 중 가장 행복했던 추억을 가슴속 깊이 안고 살아왔다. 오후 늦게야 내가 병실에 들어서니 또 다시 호흡이 가빠졌다. 잠시 안정을 찾으면서 당신은 병상을 지켜주던 며느리의 손을 힘없이 잡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에미한테 많이 서운하게 해서… 미안한디. 이젠 에미가 풀어라!”
“아니요… 어머니! 저도 잘해드리지 못했어요.”
둘이서는 아니 고부간은 한참 말없이 눈물만 적셨다. 나는 우두커니 서 있는 아들로서 정작 무슨 말을 해드려야 하나? 말없이 시간은 흘러갔다.
자정이 넘을 때쯤 당신은 며느리의 부축을 받아 겨우 몸을 일으켜 이동식 좌변기에 녹즙 같은 배내똥을 질퍽하게 쏟아냈다. 텅 빈 배를 안고 누워있는 얼굴에는 이상할 정도로 평온한 빛이 감돌았다. 그러나 다음 날 저녁 무렵 갑자기 호흡이 거칠어지더니 초점 잃은 눈동자는 어두워져갔다. 나는 당신의 손을 가만히 쥐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머니! 할 말은 없으셔요?”
말을 건네자 메마른 목소리로
“잘 있서어.”
한마디를 나직이 흘리시고, 당신은 영원한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김영채 ----------------------------------------
≪수필과비평≫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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