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엇을 할까. 이것저것 생각을 해 보다가 차라리 내세에 다시 인간으로 태어난다면 ‘이렇게 살고 싶다’는 리스트를 만들어보고 싶어졌다. 남은 인생에 몇 개의 행동지침을 만들어 실행하기보다는 인생 설계 자체를 송두리째 바꾸고 싶기 때문이다."
바람, 바람, 바람 - 신정호
요즘 신문 칼럼이나 TV 드라마에서 종종 버킷리스트에 관한 내용을 본다. 버킷리스트는 알다시피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을 적어 만든 목록이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마라톤 완주와 함께 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 등정이라고 공개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킬리만자로에 쌓여 있는 눈이 녹기 전에 올라가 보고 싶고, 다리 힘이 빠지기 전에 마라톤을 해보고 싶다.”라고.
나는 무엇을 할까. 이것저것 생각을 해 보다가 차라리 내세에 다시 인간으로 태어난다면 ‘이렇게 살고 싶다’는 리스트를 만들어보고 싶어졌다. 남은 인생에 몇 개의 행동지침을 만들어 실행하기보다는 인생 설계 자체를 송두리째 바꾸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남자보다는 그래도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 ‘아빠’보다는 ‘엄마’라 불리고 싶고, ‘엄마’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단어이기도 하니까. 자식들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엄마가 되려면 무한 헌신을 해야 되겠지. 더구나 요즘 같은 세상이라면 자녀가 완전한 자리매김할 때까지 바쳐야 할 정신적 물질적 지원은 어마어마할 텐데. 그럼 아예 독신으로 어떤 한 분야의 커리어우먼으로 당당하게 튀어볼까? 예쁜 포메라리온이나 한 마리 키우면서…….
거창하게 구국에 헌신한다거나 유명인사가 되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것은 싫다. 내가 바보가 아닌 이상 정치를 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벌써 20여 년 전 이야기다. 그 시인이 왜 국회의원 선거에 뛰어들었는지 지금은 잊었지만 당시 지인의 소개로 몇몇 친구들과 그 부부를 만났다. 부인은 무릎을 꿇고 앉아 남편의 시집 한 권을 주며 도움을 청하는데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옷차림도 수수했고 태도도 사뭇 겸손하기만 했다. 나는 연민마저 느끼며 아직 때 묻지 않은 순수함에 그를 찍었고 그는 국회의원이 되었다. 얼마 가지 않아 권력의 울안에 들어간 그 부부의 태도와 우리의 자세는 반대로 뒤바뀌었다. 결국 이 사람도 어쩔 수 없나 보다 싶었다. 그는 나중에 재선에 다시 도전하였으나 낙선하고 말았다. 어찌 이 한 사람뿐이겠는가. 선거철이면 깊이 고개 숙여 인사하던 그들이 권력을 쥐자마자 어떻게 바뀌는지를 많이 보아왔기에 정치는 아예 관심 밖으로 밀어냈고 신문이나 TV에서도 정치 쪽은 안 보고 넘겨버린다.
삶을 편안하게 즐기면서 주변 상황에 얽매이지 않고 어디로든 훌쩍 떠나 홀로 긴 여행을 하고 싶다. 자연이 살아 숨 쉬는 아프리카로, 정원이 아름다운 도시로, 고즈넉한 산간 마을로……. 자유를 만끽하며 온 세상의 다양함 속에서 나의 존재가치를 저울질도 해보고.
맛있는 음식을 앞에 놓고 요리조리 재면서 먹지 못하는 데서 벗어나 거침없이 먹고도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고 싶다. 요즘 젊은 남자애들이 소개팅할 때 상대방 여자의 얼굴 못생긴 것은 봐주지만 뚱뚱한 건 못 봐준단다. 얼굴은 나중에 성형이라도 할 수 있는데, 몸매는 본인의 부단한 노력이 없으면 힘들다나? 뭐, 꼭 이런 사고思考를 내가 충족시키기 위한 건 아니고 남 보기에 혐오감을 주어선 안 되지 않겠는가.
치매나 불치병에서 자유로운 건강한 삶을 살고 싶다. 내 건강 문제로 주위식구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내 건강함으로 어렵고 불편한 이웃을 위해 봉사할 기회를 갖고 싶다. 가끔 치매증상을 보이는 아흔일곱이 되신 어머니의 모습을 보더라도 더욱 절실하게 느껴지는 문제다.
가끔 예정에 없이 손님이 들이닥쳐도 냉장고에 남아 있는 식재료만으로 거침없이 솜씨를 내어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내는 재주가 있었으면 좋겠다. 좋은 사람들과 정겨운 대화를 나누고 거기에다 철따라 담가 둔 빛깔 고운 머루나 복분자술 한 잔 곁들여 내면 더욱 좋을 테고.
나만의 서재에서 좋은 글을 읽고, 가볍게 웃어넘기는 글이 아니라 심오하고 진지한 글, 내 맘과 철학이 담긴 진솔한 글을 쓰고 싶다. 누군가 내 글을 읽고 공감을 했다거나 감동을 받았다는 전갈을 받으면 더할 나위 없는 큰 기쁨이겠지.
무엇보다 정말 로맨틱한 연애를 한 번 해보고 싶다. 언젠가 예순이 넘은 할머니와 일흔을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사랑 이야기를 들었다. 두 분 다 재혼이고 양쪽 모두 자식들이 출가해버려 황혼기에 접어 든 두 분의 사랑은 애틋했다. 이야기를 듣는 우리가 부러워할 정도로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프러포즈를 얼마나 멋지게 했는지…….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 강원도 어느 스키장으로 드라이브를 가서 눈 덮인 설원에서 무릎 꿇고 새빨간 장미꽃 다발을 할머니께 바쳤단다. 그 안에 커다란 다이아 반지가 들어 있음은 물론이고. 그런 게 부럽다기보다는 그런 마음과 분위기가 좋다는 거다. 아니, 솔직히 그것도 부럽다.
누군가에게 나를 온전히 맡기고 기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인가. 말하지 않아도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고, 늘 곁에 있으면서 힘이 되고 의지가 되는 사람과, 늙어가면서 서로 다정하게 손잡고 바람에 날리는 흰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해 질 녘 강가를 거닐 수 있다면 좋겠다. 난 그때 핑크색 스카프를 두르리라.
나이 들어 내 생生을 뒤돌아보았을 때 참 기쁘고, 보람 있고, 후회 없이 잘 살았다고 자부하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 몸을 스스로 지탱할 수 없을 때까지 살기보다는 몸도, 마음도 건강하고, 잔잔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인생의 절정에서 죽음을 맞았으면…….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오래도록 나를 그리워하게.
나름대로 대단한 설계를 할 듯싶었는데 우물 안 개구리라고 그야말로 빤한 인생살이, 평범한 무늬로 수놓은 인생이다. 그러고 보면 지금 내 인생의 혼란기만 빼고 되풀이된다 해도 썩 나쁠 것 같지는 않다. 다만 남편만 바뀐다면 오케이! 에구- 그래도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는데 한 번 봐 줄까?
신정호 ----------------------------------------------
≪수필과비평≫ 등단.
'월간 수필과 비평 > 수필과비평 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수필과비평 2013년 2월호, 지상에서 길찾기] 결혼 31주년의 단상 - 오태익 (0) | 2013.03.14 |
|---|---|
| [수필과비평 2013년 2월호, 지상에서 길찾기] 아내의 회갑 - 안유환 (0) | 2013.03.14 |
| [수필과비평 2013년 2월호, 지상에서 길찾기] 바람, 바람, 바람 - 신정호 (0) | 2013.03.14 |
| [수필과비평 2013년 2월호, 지상에서 길 찾기] 소리 없는 대화 - 변숙영 (0) | 2013.03.13 |
| [수필과비평 2013년 2월호, 지상에서 길찾기] 부부로 산다는 것 - 박완규 (0) | 2013.03.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