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이지 나와 같은 연륜의 보통 사람들에 비하면 무엇 하나 아내에게 제대로 해준 것이 없다. 모세는 인생을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말했다. 아내는 남편을 따라오기만 하면 뭔가 더 좋은 일이 생길 거라는 기대감을 안고 열심히 달려왔을 것이다. 그러나 돌아보면 빈들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다. 삶은 그때그때마다 빈들을 만들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내의 회갑 - 안유환
내 나이 어느새 이순을 넘었고 해방둥이 아내는 지난 8월 25일 회갑을 맞았다. 잘해 주려고 애를 썼지만 특별한 기념일이나 인생을 돌아볼 기회를 맞으면 아쉬움은 한이 없다. 무엇이나 원하는 것은 다 해주고 싶었던 내 생각과는 달리 우리는 해운대 바닷가에서 조촐한 축하의 시간을 가졌다. 딸 사위와 함께 낮에는 청사포를 출발, 오륙도를 돌아오는 유람선을 탔고 저녁시간에는 달맞이고개 레스토랑에서 광안리 쪽 야경을 바라보며 저녁식탁에 둘러앉았다. 내가 결혼을 한 지도 어언 35년이 흘렀다. 세월의 가속도는 더욱 심한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젊은이들에게 혼기婚期란 한편으로 즐거운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괴로운 시기임에 틀림없다. 부모님 성화에 이끌려 이곳저곳을 다니며 여러 차례 선을 보았지만 평생을 함께할 대상자를 찾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올해도 해를 넘기는구나 생각하던 그해 10월 하순 하숙집 아주머니를 따라 수정동에 있는 한 초등학교로 선을 보러 갔었다. 복사꽃 같은 얼굴에 환한 미소의 초등학교 교사. 며칠 후 우리는 첫 만남을 가졌고 한 달반 만인 1971년 12월 18일 결혼식을 올렸다. 1970년대 초 처녀 나이 스물일곱, 총각 나이 서른이면 제법 늦은 결혼이었다. 아내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읜 아내에게는 20세나 위인 아버지 같은 형부가 있었다. 목사인 형부는 처제를 여러 차례 목회자에게 중매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것은 목사와 결혼한 맏언니의 사모생활이 얼마나 힘든다는 것을 자주 보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즈음 이화여대생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직업인기도에서 목사는 18위로, 17위인 이발사 다음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목회자와의 결혼을 기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내는 회사원인 나를 만난 것을 지극히 다행으로 생각했고 우리의 행복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신혼생활 1년을 채 넘기지 못하여 목회자가 되고 싶었던 나의 오랜 꿈은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아내에게는 늑대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 격이라 할까? 그때부터 우리는 잠자리에 들면 나의 신학교 지망에 대한 찬반토론으로 자정을 넘기기가 일쑤였다. 아내의 ‘강고집’은 좀처럼 꺾이지 않았다. 결혼한 지 10년이 가까운 어느 날 우리는 끈질긴 설전의 종지부를 찍었다. “당신의 뜻이라면 하늘 끝까지-.” 아내는 당시 유행하던 대중가요 가사처럼 그렇게도 소원이라면 어디든지 따라가겠다고 마음을 연 것이다. 그러나 우리와 함께 계시던 장모님은 여전히 딸의 행복을 먼저 생각하셨다. “얘야, 제발 안 서방 신학교 가는 것만은 말려라.”라고 말씀하시던 장모님은 내가 신학교에 입학하기 한 달 전 하늘나라로 떠나가셨다.
이때가 ‘서울의 봄’이 다시금 얼어붙기 시작하던 1981년 1월 말이었고 2월 하순에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장로회 신학대학원에 입학했다. 나의 학교생활은 천국생활처럼 즐거웠으나 아내는 혼자서 아이들을 데리고 그만큼 더 무거운 짐을 질 수밖에 없었다. 신학교의 3년이 꿈같이 흘러 나는 1983년 12월 초, 이듬해 2월 졸업을 앞두고 경남 양산에 있는 조그만 시골교회에 첫 번째 부임을 했다. 주일에는 양산에서 함께 예배했지만 아내는 여전히 부산에서 출근을 하며 이산가족생활은 석 달이나 계속했다. 그나마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이번 학기를 마치면 아내가 학교생활을 마감하기로 마음을 먹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목회의 대선배이며 지금은 고인이 된 S목사는 경제적으로 어려우면 목회를 제대로 할 수 없으니 교회 가까운 곳으로 아내의 근무지를 옮기라고 조언을 하며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내가 부임하는 교회는 S목사가 시무하던 교회가 창립 30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교회였기 때문이다. 목회자가 되면 세상의 일들은 무엇이나 깨끗이 정리하는 것이 하나님께 온전히 충성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내게는 큰 깨달음이었다. 다행히 그해 3월 초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아내는 내가 시무하는 교회 바로 옆에 있는 초등학교로 전근되었다. 그러나 교회사택이 준비되기까지 처음 몇 달 동안은 서재를 겸한 좁은 방에 두 사람이 나란히 누울 공간도 없어 반쪽으로 접은 요 위에서 칼잠을 자기도 했었다.
두 번째 교회로 옮기면서 사모의 역할에 전념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둔 아내는 교장이 된 동기들과의 만남에서 돌아오면 “내 인생은 무엇이냐.”라며 투정을 부리기도 했었다. 그러나 차츰 오지랖 넓은 할머니가 되어 남편도 교인들도 다 한 치마폭에 감싸며 교사인 딸아이가 출근하면 손자손녀를 맡아 돌보는 일까지 해왔다. 복사꽃처럼 환한 얼굴로 내 품에 안기던 33년 전의 아름다운 그 모습. 학창시절에는 성악가가 되고 싶었던 꿈도 사라지고, 가까운 사람들이 덕담하던 얼굴도 세월의 햇볕에 그을리고 이제는 약간의 당뇨까지 나타나면서 노후를 어떻게 보낼까를 염려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신문을 읽던 아내가 “여보, 60세에서 80세까지 남부럽지 않은 노후를 보내려면 13억 원이 필요하대요.”라고 말해 함께 웃었다. 정말이지 나와 같은 연륜의 보통 사람들에 비하면 무엇 하나 아내에게 제대로 해준 것이 없다. 모세는 인생을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말했다. 아내는 남편을 따라오기만 하면 뭔가 더 좋은 일이 생길 거라는 기대감을 안고 열심히 달려왔을 것이다. 그러나 돌아보면 빈들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다. 삶은 그때그때마다 빈들을 만들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 해 동안 일하며 가꾼 들판을 거두어들이면 빈들이 되고, 거두어들인 것을 소모하면서 우리는 빈 곳간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끊임없이 빈 곳간을 만들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 아닐까? 회갑을 맞은 아내와 내게 바람이 있다면 그것은 일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사랑 그리고 마무리≫의 저자 헬렌 니어링은 53년 동안 함께 살던 남편 스코트가 100세에 세상을 떠난 뒤 이렇게 회고했다. “그이의 정신은 팔십대 후반에도 여전히 분별력이 있고, 정확하며, 예민하여 여느 때처럼 강연하고, 책을 읽고 날마다 글을 썼다. 스코트는 말했다. ‘일은 사람이 늙는 것을 막는 데 도움을 준다. 일이 곧 내 삶이다. 나는 일이 없는 삶을 생각할 수 없다. 일하는 사람은 결코 권태롭지 않고 늙지 않는다.’”
안유환 ------------------------------------------
≪수필문학≫ 천료. ≪문예한국≫ 시 등단, 시집: ≪천사들의 휴양지≫, ≪서설≫, 수필집: ≪매미소리를 들으며≫, ≪발틱해의 일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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