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흘간의 축제를 위해 마련한 숄더백의 어깨가 풍선처럼 가볍다. 사람들은 저마다 좋아하는 일을 위해 시간과 정신을 투자한다."
영화는 영화다 - 김양희
바깥에는 이미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축제의 오후, 사람들이 느리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혼자서 게스트룸의 탁자에서 빵으로 저녁을 대신한다. 즐긴다는 것, 다른 유형의 삶에 잠겨 든다는 것, 그 유쾌한 일탈이 시작됐다. 하루 네 편의 연속 관람은 영화제가 아니고는 누릴 수 없는 특권이다.
가을 초입에 열린 국제영화제가 올해로 17회째를 맞았으니 이미 국내 최고의 영화 축제로 자리매김을 했다. 국내외 유명배우 백여 명이 참석한 개막식에는 국민배우 안성기와 중국 여배우 탕웨이의 사회로 별들의 잔치가 시작됐다.
영화의 전당 해운대 BIFF광장에는 외국인 단체관광객이 더 많이 보인다. 날짜별로 안내책자에서 체크한 영화 목록들. 고유번호를 확인하고 티켓 발매의 줄에 설 때부터 마음은 설렌다. 75개국에서 온 304편의 영화가 부산바다에 닻을 내렸으니 대체 어떤 영화를 볼 것인가.
몇 가지 기준을 정한다. 우선은 나라별로 평소 국내에서 만날 수 없는 영화를 선정하고, 서른 곳이 넘는 상영관의 동선과 접근성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는 선별된 주제와 스토리도 살펴야 하지만 작품성은 어둠속에서 화면이 열리고 난 다음의 일이다. 대개는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게 마련이라 더러는 단잠에 푹 빠지기도 하지만 영화는 잠시 현실을 벗어나는 도피처가 되기도 한다.
열흘간의 축제를 위해 마련한 숄더백의 어깨가 풍선처럼 가볍다. 사람들은 저마다 좋아하는 일을 위해 시간과 정신을 투자한다. 처음 며칠은 지인들과의 동행이었으나 나중 그 일도 번거로워지자 아예 혼자서 스크린을 바라보는 일이 많아졌다. 그게 훨씬 편했다. 이번에도 관심이 가는 쪽은 역시 이란 영화였다.
<정원사>는 그런 의미에서의 첫 번째 선택이었다. 170여 년 전 이란에서 시작된 종교 바하이의 본거지에는 넓고 아름다운 정원이 있다. 모흐센 마흐말바프 감독과 그의 아들 메이삼 마흐말바프는 각자의 카메라로 상대를 찍으며 정원에서 대화를 나눈다.
부자간의 대화는 종교관, 세계관, 영화관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있고 종교가 인류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논쟁한다. 그들 생각은 때로 극명하게 엇갈리는 세대 간의 간극이 있지만 카메라는 국경과 이데올로기를 뛰어넘는다. 일정한 스토리텔링이 없이 평등을 지향하는 바하이 종교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평화로운 화면으로 이어지는 영화다.
마흐말바프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사회주의 예술운동에서 벌어졌던 문화적 논쟁의 협소함을 느낄 수가 있다. 그는 10대 때이던 사십여 년 전 투옥된 반체제인사로서 그 작품들 중 일부는 본국에서 상영금지되고 있다. 팔레비 왕정시절 정부 이슬람조직 소속으로 활동하다 자신에게 총을 겨눈 경찰을 칼로 찌른 혐의로 체포돼 6년간 옥살이를 했다.
그의 영화인생은 감옥 출소 후 시작됐다. 팔레비 왕조는 이슬람 민주화혁명으로 물러났지만 그의 반골인생은 바뀌지 않았다. 이번에는 이슬람주의 정권이 예술적 탄압을 가해왔기 때문. 아내와 두 딸도 영화감독으로 활동하는 영화가족이기도 한 그는 정부의 영화검열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등 수시로 반체제적 의견도 발표한다.
이스라엘에서 찍은 이번 영화 <정원사>를 들고 아들과 함께 국제영화제를 찾은 그를 위해 레드카펫 행사를 열고 있었다. 그들 부자의 걸음걸이는 당당했다. 최근에는 김동호 BIFF 명예위원장을 위한 다큐멘터리를 찍는 모습이 여기저기서 보이기도 했다.
<아비가일>은 한국계 미국인 감독 정이삭이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작품인데 사랑을 통해 외롭고 고독한 현실을 초월하는 이야기다. 뉴욕에서 장애인과 노인들에게 책을 읽어주며 살아가는 중년의 여성 아비가일. 주인공 ‘아만다 플러머’의 역할은 슬프게도 선녀가 아니라 나무꾼이다.
그녀는 낯선 동양 청년을 만나 도움을 주고 그 남자와 애정을 나눈다. 언제 그녀가 숨겨놓은 옷을 찾아 그가 떠나버릴지도 모르는 불안한 관계. 스토리 중심보다는 분위기나 느낌을 중요시한 작품이라 다소 현실성이 떨어지기도 하지만 상징적이고 몽환적인 이 영화에서 아만다는 아비가일의 고독한 내면을 아름답고 아프게 표출해낸다.
<사운드 오브 뮤직>의 배우 크리스토퍼 플러머의 딸이기도 한 그녀는 감독에게 직접 메일을 넣어 이 영화의 출연을 요청해 ‘운명의 연락’이 오길 기도했다는 귀여운 여인이다. 결코 미인이 아니라 다소 투박하고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외모의 그녀는, 스타란 미모보다는 연기력으로 승부한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번 영화제에서 가장 깊게 몰입한 영화는 캐나다의 <진실된 거짓>이다. 진실은 종종 그 단어가 가진 뜻과는 다르게 현실의 모든 것을 부정하게 만든다. 이 영화는 감당하기 힘든 진실을 파헤치는 한 아들과, 진실로부터 아들을 보호하기 위한 아버지의 이야기다.
교통사고로 순식간에 엄마를 잃은 컬른은 엄마의 유품에서 비디오테이프 하나를 발견한다. 테이프에는 어머니가 결혼 전 강간당했으며 컬른은 그로 인해 태어난 아이라고 말하는 어머니의 고백이 담겨있다. 현재의 아버지가 친부가 아니라는 데 충격을 받은 컬른은 어머니를 강간한 남자를 찾아 나서기에 이른다.
범인이자 동시에 아버지이기도 한 남자를 찾는 청년의 이야기는 짐짓 무거워 보이지만 영화는 감동, 서스펜스, 유머 그 무엇 하나도 놓치지 않은 종합선물세트다. 너무 많은 것을 한 작품에 담았다는 점에서 다소 산만해 보일 수 있지만 이보다는 다양한 장르를 한데 녹이는 감독의 조화로운 균형 감각이 돋보인 수작이었다.
인간의 순수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부인과 세 자녀를 어두운 집안에 감금하고 사는 광기의 아버지를 다룬 <순수의 성>은 1950년대 멕시코시티에서 벌어진 끔찍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독일 하층민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상을 독특한 리듬으로 담아낸 <아넬리>, 프랑스 체제에 저항하는 젊은이들 얘기인 <오월 이후> 등이 특별한 기억으로 남은 영화들이다.
영화제 출품작 중에는 졸작이 없는 것도 아니다. 아프가니스탄 <라비아 발키>의 경우, 계속 끊어지는 필름과 낡은 흑백 화면의 후진성에 시력이 견디지 못해 중간에 나온 적도 있었으니……. 이밖에 선별한 레바논, 터키, 콜롬비아, 모로코, 아르헨티나 등의 영화는 화면을 통해 그 나라의 문화와 생활상에 접근해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축제는 끝났다. 영화의 바다에 빠졌던 영상예술의 잔치는 가을바람의 쓸쓸한 기운과 함께 멀어져 갔지만 스크린과 함께 향유한 문화의 향기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영화는 영화 그 이전에 언어를 초월한 소통과 생각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힘을 그 속에 담고 있다.
아무래도 영화를 좋아하는 이 습벽은 내게 살아있는 동안의 어떤 과정인 듯도 하다. 게스트 티켓을 미리 발매해준 지인에게 감사하면서 내년 이맘때쯤이면 나는 또 영화의 전당을 찾을 것이다.
김양희 ----------------------------------------
≪수필과비평≫ 등단, 수필집: ≪순례의 여정≫, ≪마라강과 가브강≫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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