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린다. 을해乙亥년 첫눈. 흰 벌레들이 곰실곰실 궁륭
穹㝫의 잿빛 자궁을 빠져나와 허공에 한순간, 눈부신 생을 누리다가
지상에 닿자마자 숨가쁘게 스러진다. 더러는 미련이 남아 한데 뭉
쳐 대지의 따스한 품에 안기기도 한다.
새벽녘 창가에 술렁이는 소란스러움에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여
니, 온통 세상이 하얗다. 승용차 한 대가 집 앞 언덕배기 중턱 위에
서 만성기관지염을 앓는 환자처럼 그르렁대고 있는데, 아버님이 참
견하는 왕청된 말소리가 새벽 공기를 가르며 내 귓전을 두드린 것이
었다. 나는 눈두덩을 비비며 섰다가 하릴없이 도로 이불 속을 파고
들었고,‘ 얘야, 밥먹어야지.’하는 어머니의목소리에 열시나 돼서
야 몸을 일으켰다.
구수한 냄새에 코를 앞세워 주방으로 나서니 식탁 위 똬리 위엔 청
국장 뚝배기가 놓여 있고, 그 옆으로 투명하고 옴폭한 유리그릇 안
에는 동치미가 담겨 있다. 새파란 무 이파리가 동동 떠 있는 국물을
아버님이 한 술 뜨시며 “동치민 이렇게 추울 때에야 제 맛이 난다니
까.”하시었다. 그러나 내 눈길은 왠지 자꾸 싱크대 위, 손수건만 한
창구멍으로 향하며 흩날리는 눈송이를 힐끔거린다.
아마 다섯 살 즈음이었을 게다. 큰집에 다니러 갔다가 작은삼촌이
만들어 준 통철사로 날을 댄 썰매를 안고 할머니 등에 업혀 집으로
돌아오던 때의 일이다. 다랑논을 가로질러 산등성이를 넘어야 하는
십여 리 길인데, 짧은 겨울에는 이미 설핏했건만 빨리 집에 가서 동
무들에게 자랑도 하고 썰매도 지치고 싶은 나의 성화에 할머닌 내처
날 둘러 업으셨다. 논배미를 톱아오르다 보니 잠포록한 하늘은 어느
새 험악해지며 눈보라를 휘날리기 시작하더니 금세 한 치 앞을 가늠
할 수 없을 정도로 사방은 희뿌애졌다. 할머니는 대구 썰매를 버리
고 가자고 “그깐 놈의 썰매, 다시 맹글면 되지 않느냐.”고 하시었다.
주체스러운 데다 썰매를 움켜쥔 내 손은 추위에 무방비 상태로 드러
났기에 할머니는 손자의 손이라도 얼까 봐 걱정이었던 것이다. 허나
그때 내 어린 소견에 썰매가 왜 그리 소중했던지, 나는 설령 손이 얼
어터진다 하더라도 개의치 않았으리라. 썰매는 곧 ‘나의 세상’이었
으니까. 결국 할머니의 간곡한 회유에 못 이기는 척하며 나는 꼬챙
이만 논바닥에 내동댕이친 채 나의 세상은 무사히 갖고 집에 돌아왔
던 것이다. 훗날 그때를 두고 할머니는 “애녀석 왠 고집두. 황소 똥
고집이여.”하시며 도리머리를 저으셨다.
할머니는 그 후 서울로 올라와 중풍을 여러 해 앓다가 돌아가셨
다. 나는 끼니때면 마루를 사이에 둔 할머니가 누워 계시는 건넌방
과 안방 미닫이를 드르륵, 드르륵 열어젖히며 철없이 뛰어다니던 생
각이 난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 난 꿈속에서 그분을 뵈었다. 할머니는 쪽진
머리에 무명옷을 입으시고 가슴에 보퉁이를 껴안은 채 시골 고향집
돌담길을 황급히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나는 울먹이며 맨발로 마당
으로 뛰어나와 손을 들어 할머니를 불렀다. 할머니는 힐끗 뒤를 돌
아보며 ‘어서 들어가. 따라오지 말어.’하는 시늉으로 손을 내저으셨
다. 그리고 골목이 끝날 때쯤 할머니는 어둠을 밟으며 몸이 두둥실
떠오르더니 허공 중에 한 점 흰 점으로 멀어져갔다.
“이런 날은 국수를…….”
아버님이 이번엔 푸짐한 김치 대접을 보시고는 의자 위로 한쪽 다
리를 끌어당겨 무릎을 곧추세우셨다. 그러고는 “국수를 한 관 사다
김치를 숭덩숭덩 썰어 꿩이니 닭괴기와 함께 넣고 끓이면 이만한 양
재기로 그득 딱 열두 그릇은 나올 거야. 지금은 스물이 먹어도 남을
양인데, 그땐 서넛이 그걸 깨끗이 해치웠지. 헌데 요즘은 통 입맛이
없어.”하시며 다리를 바닥에 내리시는 서슬에 마침 한 손에 쥐고 계
시던 수저와 젓가락도 탁자 위에 탁, 하고 놓으셨다. 이때다 싶었는
지 어머니는 아금받게 “담배를 하도 많이 태시니 아무 입맛도 없는
거예요.”하시었다.
“어허, 그런가.”하시며 아버지는 고개를 들어 열없다는 듯이 웃으
신다.
싱크대 설거지통 안에는 물에 담가놓은 미역이 보인다. 내일은 아
버님 환갑을 두 해 앞둔 쉰여덟 번째 생신날이다. 마침 싱크대 선반
위에 시뻘건 것이 눈에 띄었다.
“엄마, 저거 뭐예요?”
“응, 정육점 강姜씨가 사냥갔다 잡은 거니깐 맛 좀 보시라구 한 마
리 주더라.”
그것은 털이 몽땅 뽑히고 고개가 외틀어진 산새였다. 참새보다 훨
씬 더 커 보였다. 문득 살아 있을 때 적갈색 깃을 입고 비상하는 새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고는 이내 그것은 어릴 적 고향 아
궁이에 구워먹던 감칠맛 나는 한 줌 고깃덩어리였다.
“저거 그냥 놔두세요. 내가 구워먹게.”
“아주 맛있다. 자알 구워야지. 깨스불에 굽다 태울라. 굽기 전에
미리 소금을 치고.”
그러고 나서 아버지는 마른기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는“새고기가
얼마나 맛있는고 허니……”하며 이렇게 물었다.
“소 잔등 위에 앉은 참새가 발을 구르며 소한테 뭐랬는지 아니?”
“아뇨. 뭐랬는데요?”
“그러니깐,‘ 네(소) 고기열점이내고기한점만하랴.’했단다.”
그 말을 들은 어머님 하시는 말씀.
“그럼 저거 낼 당신 생일날 미역국에 넣읍시다. 새 한 마리니 쇠고
기 열 근 아니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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