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나의 스마트 폰에 올린 글을 새겨보며 하루를 자문해본다. “하루를 잘 사는 것만큼 훌륭한 예술은 없다. 오늘 너의 하루는 예술이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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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 겉핥기 / 권오훈
오랫동안 별러왔던 스페인 여행이었다. 누군가는 스페인 여행이 해외여행의 마지막 코스라고도 한다. 그만큼 볼거리가 많다는 뜻이리라. 같은 유럽이라도 이슬람의 지배를 받은 적이 있는데 이슬람사원을 헐어내지 않고 그 위에 가톨릭 성당으로 개축하여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는 다른 양식인 데다 천재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가 설계한 명작 건축물도 볼 수 있는 그곳은 그야말로 문화유산의 보고다.
저렴한 비용을 선호하는 일부 사람들 때문에 취사 선택한 상품은 6박 9일이란 길지 않은 일정, 오가는 비행시간이 15시간 이상이라 중간 기착지를 경유하니 가는 날, 오는 날은 오가는 데 허비하고 정작 여행을 한 날은 6일에 불과했다. 싼 가격을 찾는 소비자와 그 요구에 부응해야 하는 여행사의 교묘한 상술이 작용하여 ‘저렴한 가격에 유명 관광지 모두 포함’이란 상품이 만들어진 탓이다.
아파트 이웃사촌 다섯 쌍의 부부가 정기적으로 해외여행을 가기로 하고 매월 적금을 넣으며 돈을 모았다. 격년제로 여행을 다니며 우정과 추억을 쌓아왔다. 4년 전의 호주 뉴질랜드 여행은 멋진 자연경관과 긴 버스 여정이 이어졌다. 여행사에 독립상품을 요구해서 옵션을 여행 일정에 포함했다. 선택 관광을 강요하지 않아 실랑이 할 일도 없고 세상사 모든 것, 심지어는 국내정세까지도 두루 꿰고있는 가이드의 입담에 지루한 줄도 몰랐다. 다른 일행들과 친해져서 현지의 맛있는 음식도 번갈아 사고 게임도 하며 재미있게 다녔다. 그런 여행을 또 하자며 추억을 되새기곤 했다.
이웃들은 60대 중반인 데다 인문학적이라기보다는 자연친화적인 성향이다. 역사적인 건축물이나 대가의 그림보다는 자연경관에 더 마음을 빼앗긴다. 오죽하면 여자들은 긴 줄의 기다림 끝에 가우디 최고의 건축인 성가족성당(사그라다 파밀리에)에 입장해서도 멋진 건축물 감상보다는 소변보기에 급급하여 나가면 들어올 수도 없는 바깥 화장실로 직행했다. 리스본의 구시가지는 한 시간 반 동안 전동차를 타고 천천히 골목 구석구석을 살펴보며 언덕 위를 올라가는 코스다. 도중에 빨리 데려다 달라는 다급한 여성의 성화에 화장실이 있는 언덕 위로 30분 만에 내달았다. 비싼 추가요금을 지불한 애꿎은 일행들까지 번갯불에 콩 구워먹는 관광을 해야 했다. 그래서 해외여행은 가슴이 뛸 때가 아니라 다리에 힘 있을 때 하라고 했나보다.
현지의 가이드는 딱히 불친절하진 않았지만 매우 이해타산적이었다. 무려 아홉 가지나 추가 관광을 옵션으로 제시했다. 사실 추가 관광은 말이 추가지 거의 핵심적인 체험 관광이다. 안내라기보다 강요와 협박에 가깝게 받아들여졌다. 가이드 없이 다니기엔 강도가 유난히 득실거리니 추가 관광을 않는 자유 시간 동안에는 안전을 책임질 수 없다고 했다. 이곳까지 힘들게 왔는데 돈 몇 푼 때문에 여행의 진수를 놓칠 수는 없다는 중의에 떠밀려 싫든 좋든 수용하게 된다.
제대로 살펴보려면 두어 시간은 걸려야 할 관광지를 듬성듬성 지나가면서 해설을 해주고는 지금부터 한 시간 줄 테니 시간 내로 둘러보고 약속장소를 찾아오라며, 늦으면 두고 떠날 수밖에 없다고 겁을 주었다. 사람들은 카메라에 인증사진만 서둘러 담고 두서없이 돌아다녔다. 설명문을 읽을 여유도 없었다. 나중에 사진을 보며 내가 여기를 다녀왔구나 하고 회상할 것이다.
가이드로서는 여행 계약서에 명시된 관광지는 빠트릴 수 없다. 한 곳이라도 빼먹으면 소비자가 항의하고 본사는 가이드를 다시 배정해 주지 않을 것이다. 촉박한 일정에 정신없이 몰아붙이지 않을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차라리 추가 관광을 모두 포함하고 여행 비용을 현실화시켰으면 이런 스트레스는 없을 텐데 아쉬움이 남는다.
도서관에서 책을 열람하다 만난 N 선생은 내외가 패키지여행을 이용했지만 훨씬 저렴한 비용으로 알뜰하게 즐겼다고 자랑했다. 관련 서적 서너 권을 통독하면서 여행 가면 둘러볼 곳과 관람할 공연을 정하고 일정에 맞춰 미리 인터넷 예약을 하면서 준비한 끝에 숙소 체크인이 끝나면 바로 작은 가방 하나 메고 시가지로 나가 현의 밤 문화를 마음껏 즐겼다고 한다. 선택 관광을 하지 않고 자유여행을 한 셈이다. 처음에는 곱지 않은 시선을 보이던 가이드도 나중에는 포기하고 양해해 주더란다. 가이드가 선택 관광과 쇼핑 수수료로 부족한 수입을 보충한다는 사실은 회자하는 얘기다.
나는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언급한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낀다.’는 말을 떠올렸다. 여행의 진수를 제대로 맛보기 위해 여행 책자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자료를 수집하고 먼저 다녀온 사람들에게 여행담을 들었다. 사전지식을 바탕으로 바라보는 사물은 확연히 다르게 보인다. 그저 건물이 웅장하네, 장식이 화려하네 하면서 건성으로 보고 감탄하고 스쳐가는 게 아니라 주춧돌 하나, 장식 하나도 눈여겨보고 손으로 만져보노라면 그것들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 보이고 느낌이 온다. 숲속의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를 세심히 살펴보지는 못했지만 숲은 보지 않았을까 자위해본다.
간송이 수집한 조선 시대 명품 회화가 삼 개월간 대구미술관에서 전시되었다. 너도나도 다녀왔다고 자랑했다. 친구를 구슬려 함께 갔다. 미술에 관심이 있을 거라 여겼는데 주의가 산만했다. 급기야 전화를 받고는 먼저 가봐야겠다고 했다. 작품 수도 의외로 많은 데다 빽빽한 설명까지 읽으면서 감상하려면 두어 시간은 족히 걸리는 걸 주마간산 격으로 후딱 보고 나왔다. 아쉬움이 컸다. 찍어온 사진과 설명문을 관련지어 자세히 읽고 도서관에서 관련 서적도 빌려다 보면서 앎을 보탰다. 짬을 내어 다시 박물관을 찾았다.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찬찬히 둘러보았다. 오롯이 그림만을 보면서 감상할 수 있었다.
수박의 겉만 핥아보고 입안을 가득 채우는 담백하고 달콤하고 청량한 그 맛을 음미할 수 있을까. 우리는 준비 없이 맞닥뜨리는 일상에서 겉만 핥는 일을 곧잘 겪는다. 나의 일상은 매일이 같아 보여도 같은 날은 하루도 없었다. 같을 것 같은 일상 속에서 인생의 행복을 찾고자 하는 열망이 있는 사람이라면 온전한 느낌을 위한 앎을 추구할 것이다. 그 소소한 일상들이 모여 작지만 소소한 행복이 될 테고 그 작은 행복들이 모여 종국에는 행복한 인생이었노라고 자위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나의 스마트 폰에 올린 글을 새겨보며 하루를 자문해본다. “하루를 잘 사는 것만큼 훌륭한 예술은 없다. 오늘 너의 하루는 예술이었는가?”
권오훈 님은 수필가. 《수필과비평》 등단, 수필집 : 《가지 않은 길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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