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시월이면 억새 축제를 하는 하늘공원(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오른다. 정상에 오르면 아스라이 펼쳐진 공원에는 억새가 하얀 고깔을 쓰고 춤을 추고 있다. 아름답게 금의백발金衣白髮을 하고 추어대는 망무芒舞(억새 춤)를 감상하려는 관객들로 공원은 인산인해다. 바람의 추임새에 맞추어 억새는 실기죽 샐기죽 서로 몸을 비벼대며 애무를 해댄다. 그렇게 접문하는 억새의 교성嬌聲은 또 얼마나 몽환적이고 야릇한 소리聲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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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소리에 대하여 / 윤덕종
우봉宇峰 이매방李梅芳(1927~2015) 선생의 승무를 관람한 적이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당시만 해도 우봉宇峰선생의 승무를 접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음에도 선배 덕에 행운을 접할 수 있었다.
흰 고깔을 쓰고 하얀 장삼을 입었다. 살망살망 걷는 듯, 멈추는 듯, 정중동靜中動에서 동중정動中靜을 오가는 발걸음이 새털처럼 가볍게 나부낀다. 사분사분 나긋나긋 감아 돌던 발걸음이 갑자기 미끄러지듯 내닫는 하얀 버선코가 유난히 뾰족하다. 두억시니夜叉의 엉덩이를 걷어차려고 저리도 암팡스럽게 뾰족한 것일까. 고개를 모로 갸우듬히 기울이고 양팔로 장삼 자락을 펄럭일 때면 구만리장천을 난다는 붕새의 날갯짓처럼 우아하고 웅장하기까지 하다. 때로는 태질 하듯 홀연히 뿌리치는 장삼 자락으로 세상의 모든 번민이 하얗게 허공으로 튕겨져 날아가는 듯 시원했다. 저리도 격조 높은 승무를 만들어 내는 고수의 장단 소리는 참으로 신묘한 소리聲가 아니던가.
해마다 시월이면 억새 축제를 하는 하늘공원(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오른다. 정상에 오르면 아스라이 펼쳐진 공원에는 억새가 하얀 고깔을 쓰고 춤을 추고 있다. 아름답게 금의백발金衣白髮을 하고 추어대는 망무芒舞(억새 춤)를 감상하려는 관객들로 공원은 인산인해다. 바람의 추임새에 맞추어 억새는 실기죽 샐기죽 서로 몸을 비벼대며 애무를 해댄다. 그렇게 접문하는 억새의 교성嬌聲은 또 얼마나 몽환적이고 야릇한 소리聲이던가.
내친김에 소리에 대한 옛날얘기 하나 옮겨보려 한다. 조선의 14대 임금 선조 때의 일이라고 한다. 선조를 두고 임진왜란을 겪은 불행한 임금이라고 하지만 기대승, 이이, 정철, 류성룡 등 기라성 같은 문신들과 이순신, 권율 같은 조선 최고의 명장과 곽재우를 비롯한 수많은 의병장의 도움을 받았던 복 많은 임금도 그리 흔치 않았을 것이다. 어느 날, 그 시대에 내로라하는 다섯 대신이 모인 잔치가 있었다고 한다. 정철 鄭澈, 류성룡 柳成龍, 이항복 李恒福, 심희수 沈喜壽, 이정구 李廷龜, 다섯 사람이 한창 잔을 돌리면서 흥을 돋우기 위하여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라는 시제를 가지고 시 한구씩을 읊어 흥을 돋우자고 했단다.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먼저 운을 뗐다.
淸宵朗月 樓頭閼雲聲 (청소낭월 누두알운성) <맑은 밤 밝은 달빛이 누각 머리를 비추는데 달빛을 가리고 지나가는 구름의 소리.>
일송一松 심희수沈喜壽
滿山紅葉 風前猿嘯聲 絶好 (만산홍엽 풍전원소성 절호) <단풍이 붉게 물든 가을날 멀리서 원숭이가 우는 소리 바람결에 들려오는 것도 더욱 좋지요.>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曉窓睡餘 小槽酒適聲 尤妙 (효창수여 소조주적성 우묘) <새벽 창가로 잠결에 들리는 작은 통에 술 거르는 소리도 참 좋지.>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山間草堂 才子詠詩聲 亦佳 (산간초당 재자영시성 역가) <산간 초당에서 선비가 시 읊는 소리도 역시 아름답지요.>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은 네 사람이 점잖게 한마디씩 읊는 것을 듣고 있다가 빙그레 웃으며 한마디 하였단다. 대감들께서 말씀하신 소리는 모두가 듣기 좋은 소리지요. 그러나
令人喜聽莫若 洞房良宵 佳人解裙聲也 (영인희청막약 동방양소 가인해군성야) <정말로 듣기 좋은 소리는 동방화촉 좋은 밤에 아름다운 여인의 치마 벗는 소리지요.>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모두는 오성대감의 ‘여인의 치마 벗는 소리’를 최고라고 추켜세우며 박장대소했다고 한다. 당시의 대학자요, 문장가였지만 운우지정雲雨之情을 소홀히 할 수 없는 게 인간의 본성임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다. 그들은 소리聲라는 시제로 풍류와 해학의 멋을 한껏 풍미했었다.
나는 마포 하늘공원에서 억새의 향연에 흠뻑 취했다. 억새의 교성이 문득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시구를 떠오르게 했다. 억새들이 실기죽거리며 접문接吻하는 소리는 무르익어가는 가을의 소리가 아니던가. 오성대감의 시구에다 주제넘게 내가 들은 가을 소리를 빗대어 보았다.
紫芒花園 隨風接吻聲 絶好 (자망화원 수풍접문성 절호) <억새 동산 바람 따라 입 맞추는 소리가 더없이 좋다.>
아무리 세상에 아름다운 소리가 많기로서니, 나의 투박한 입술이 촉촉한 아내의 입술 위를 더듬고 지나가는 소리에 어찌 비할 수 있음이던가.
윤덕종 님은 수필가. 《좋은수필》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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