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수필과 비평/수필과비평 본문

월간『수필과비평』[2019년 4월호, 통권210호 I 지상에서 길 찾기] 너무 사랑한 죄 - 김선화

신아미디어 2019. 5. 2. 19:46

"다시 새봄 열려 우수·경칩 지나 나뭇가지마다 물이 올라 기운차다. 그 물상들을 바라보며 사람 몸의 피돌기에 대해 생각이 깊어간다. 금세라도 거침없이 수액을 빨아올리는 나무가 되어 씽씽 바람 가르는 소리를 내면 좋겠다. 그렇다면, 우물가의 옛 풍경도 저만쯤 멀어지려나."


 







   너무 사랑한 죄     -    김선화


   우리 샘이라 했다. 건수라고도 했다. 큰비 오면 물맛이 달라 어머니는 수시로 약수를 길어 날라 식수로 삼았다. 이웃과 우리 집 사이 삼각구도를 이루는 이 샘은 두 집 식구들이 먹고 살았다. 엄밀히 따져 옆집 땅 안에 들어있는 샘이었다.
   어릴 때는 샘 하나가 누구네 영역에 속하는지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어른들도 굳이 그런 경계를 만들려 하지 않았다. 하여 샘 바닥 돌 틈을 기어다니는 가재 무리조차 우리 것이며 이웃집 것이었다. 내가 자라는 사이 이웃은 주인이 한 번 바뀌었으니, 내 안에도 터주 근성이 조금은 자리 잡았던 모양이다. 샘 길 밭둑에 늘어선 늙은 뽕나무들은 모두 내 것이었다. 더위가 시작될 무렵 익기 시작하는 오디는 신맛을 드러내는 붉을 때부터 훌륭한 간식이었다. 실하게 자라 검게 익으면 내 웃옷 앞자락은 깨끗한 날이 없었다.
   그렇게 뽕나무 가지에 올라서서 만찬을 즐기는 몇 년 새에 우리 형제들은 쑥쑥 자라났다. 뒷산에 가서 물 떠와라 하면, 주전자를 들고 구릉을 하나 휘돌아가 산중턱에서 솟는 약수를 모래알까지 떠 날랐다. 언니는 물지개질을 할 만큼 컸고 언덕을 몇 개씩 오르내리며 약샘이라 부르던 맛 좋은 물을 길어 날랐다. 그러는 사이 옆집 아저씨는 철조망으로 땅의 경계를 그었다. 자연적 우리가 샘에 가는 길도, 세수하고 빨래하던 샘도랑도 영역표시가 확실해졌다. 온전히 들어서지 못하게 막은 것은 아니나 어린 우리들도 알아차릴 정도로 분위기가 달라졌다.
   때를 같이하여 어머니와 나는 물을 당겨쓰는 문명을 접하게 되었다. 처음 나서본 동학사 소풍 길에 호스가 담긴 커다란 물통을 본 것이다. 너무도 신기하여 이 물이 어디서 나는가 물으니 상인 아주머니 말이 산에서 끌어온다 하였다. 현지대보다 수원지가 높기만 하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상세히 일러주었다.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는 산마을의 모녀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이 뜨이고 귀가 열렸다. 절간 나들이는 기억에도 없고, 신문명을 확인한 그 사건만이 뇌리를 채우고 있다.
   그런 계기로 마련된 울안의 요람. 커다란 고무통이 우리들의 물탱크였다. 거기서 아버지는 닭의 배를 가르고, 토끼의 배를 갈랐다. 담 밖 외진 곳에서 명을 거두어 뒷손질은 물가에서 하는데, 그때마다 남동생들이 고물고물 모여 아버지를 에워쌌다. 뚝 떨어져 놀고 있는 어린 동생들까지 손짓하여 부른 아버지는, 동물의 해부학을 몸소 실천하며 올망졸망한 아들들에게 알기 쉽게 설명하셨다.
   “이것은 간이고, 요것은 허파고, 또 이놈은 콩팥이다.”
   나는 여자라서 일부러 불러 세우지도 우대하지도 않았지만, 그 진풍경은 산마을 외딴집의 축제이기도 했다.
   “자, 자, 봐라. 줄줄이 달린 이것은 닭의 알집이다.”
   암탉의 알주머니는 여러 개의 풍선이 이어진 모양으로 엷은 막 속에 있었는데, 달이 점점 멀리 보이는 것처럼 순차적으로 줄어드는 형상이었다. 그 중 검붉은 날것의 간은 성장기의 동생들에게 남자다움을 증명하는 표상이기도 했다. 아버지로부터 순서를 타내야 입에 들어가는 매우 고급스런 것으로, 입을 있는 대로 벌리고 그것을 받아먹는 표정들은 한마디로 괴이쩍었다. 눈을 질끈 감으며 꿀꺽 삼키고는 드디어 저도 사나이다움을 한 가지 해냈다는 자긍심에 어깨들을 으쓱해 보이기도 했다. 대여섯 명의 동생들이 번갈아 그 귀한 체험을 하기 위해서는 그에 비례하는 우리 집 닭, 토끼들의 헌신이 따르기 마련이었다. 살생 금하기를 원칙으로 삼는 도인 아버지였지만, 식솔들의 뱃구레를 불리기 위해서는 단연 초월해야 하는 일상이 있었다. 나는 항상 관찰자 입장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며 흐뭇해하였다.
   그때 유독 내가 집중하는 것은 콩팥이었다. 교과서에서 수없이 접하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선생님의 설명을 들었으며, 제법 그럴듯하게 그림을 그려가며 익힌 바로 그것. 작은 동물들의 몸 안을 들여다보면서 자연스레 생물체에 눈을 뜬 나는 일찍이 그 앙증스런 선홍빛에 감동하곤 했다. 콩과 팥을 닮아 콩팥이라 한다는데, 그 역할에 대해서는 미처 알지 못했다. 인체의 내부조직에 대해 가르치니 배웠고, 점수를 따야 하니 외운 것뿐이었다. 샘 쪽으로 난 담장이 열려있고 건넛집 철조망이 열려 있어 대자유를 누리던 유년의 계집아이는, 담장 안 새로운 우물가에서 벌어지는 학습을 통해 일찍이 몸 안의 장기 그 붉은 것을 사랑하게 되었으니….
   한데 어른이 되어 종종 그때의 작은 콩팥을 생각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의식이 그 두 글자에 매여 창살 없는 감옥에서 살아가고 있는 까닭이다. 우량아로 자라던 큰아이가 세 살 때 열병을 앓아 신장이 약해졌고, 나는 막 문단에 나와 글발이 뻗칠 만한 서른 중후반에 한 차례 그것으로 인해 기가 꺾이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살얼음판 디디듯 조심스레 꾸려온 둥지가 어느새 아슬아슬 휘청거린다. 비바람 몰아치는 중에 가까스로 붙어있는 둥지 안의 참새 가족처럼, 서로 기댄 몸짓들이 애처롭기 그지없다.
   은연중에 드러나는 사람의 행위나 언사는 그 사람의 앞날을 예고하는 일과도 닿아있다고 한다. 그것이 길할 수도 있고 흉할 수도 있는데, 말을 쉽게 앞세우지 말자는 주의도 그런 맥락에서 싹터온 것이리라. 삶을 통찰할 수 있는 예지의 눈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런 부분에서 더욱이 조심하기 마련이리라. 그러나 그 무렵의 내 마음은 왜 그리도 그 붉은 것에 가 닿았는지 알 수 없다. 진중하기로 둘째라면 서러울 아버지로서도 그러한 딸자식의 눈빛을 미처 헤아려볼 새가 없었을 것이다. 지금 와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토끼나 닭의 뱃속에 들어앉았던 고귀한 것을 너무 사랑한 죄를 스스로 의심해보는 것이다.
   다시 새봄 열려 우수·경칩 지나 나뭇가지마다 물이 올라 기운차다. 그 물상들을 바라보며 사람 몸의 피돌기에 대해 생각이 깊어간다. 금세라도 거침없이 수액을 빨아올리는 나무가 되어 씽씽 바람 가르는 소리를 내면 좋겠다. 그렇다면, 우물가의 옛 풍경도 저만쯤 멀어지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