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병은 질기고, 생각은 자꾸만 짧아지는 걸 지금 느끼고 있습니다. 이 느낌에서 벗어나고자 노력은 하지만 지금으로선 시일이 좀 더 나를 잡아 놓을 것 같습니다."
봄 굴렁쇠 - 유병근
봄을 소재로 한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은 다음날 119 앰뷸런스를 타고 부산대학병원 응급실에 실려 가야 했습니다. 병원에서 응급처치만 받고 곧 집으로 돌아올 것이란 생각을 하면서 봄을 어떻게 써야 할까를 순간순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응급실이란 이런저런 응급환자로 때로는 아우성과 신음 소리로 도떼기시장이나 다름없어 보였습니다. 아침 일찍 응급실에 도착은 했으나 정작 받아야 할 진료는커녕 오후 늦게야 엑스레이 촬영을 마치고 응급환자 입원실로 옮겨졌습니다. 갑자기 몸이 무거워졌습니다. 병실에 누우니 병실의 공기란 것이 코에 닿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무슨 방귀 냄새이고 오줌에 저린 축축한 냄새 같은 것이었습니다. 어릴 때 우리 집 퇴비간에는 차곡차곡 쌓인 거름 무더기에서 뽀얀 김이 수증기처럼 솟아오르고 그 김 줄기 같은 가느다란 버섯이 자라기도 했습니다. 병실의 퀴퀴한 공기에 길들여야 비로소 병실생활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입원하고 사흘째 날인가 침대 발치에 ‘금식’이라는 팻말이 걸리고 그 다음날 시술을 받으러 갔습니다. 부분마취를 한 의사는 배꼽 어딘가를 째는 듯하고 그 속의 아마 식도 같은 것을 아주 조심스럽게 꺼내는 것 같았습니다. 의사는 참으로 신중했습니다. 그러나 그 시술은 결과를 맺지 못했습니다. 제2차로 시도한 시술 또한 실패하고 나는 더욱 지쳐버렸습니다. 그날 밤 꿈에 혹 저승사자가 나타나서 내 이름을 불러주기를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시술실에 실려 가면서 본 바깥풍경이라야 아주 단순했습니다. 그 단순미가 때로는 마음에 들었습니다. 병원복도에는 봄기운 같은 것은 전혀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창밖 뜰에 빨간 꽃이 핀 나무 한 그루가 보였습니다. 아마 동백일 것이라고 잠깐 생각했습니다.
누가 이미 말했는지 모르지만 세 사람이 담장에 기대어 햇볕을 쬐고 있는 글자가 봄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생각은 나를 줄곧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나 병원 병실에는 봄은커녕 퀴퀴한 냄새만 병실 분위기를 더욱 무겁게 했습니다. 이 분위기에서 벗어나고자 나는 나름대로 봄을 보는 생각의 눈을 키우고자 했습니다.
서당개 3년에 풍월 읊는다는 말이 떠오른 것도 그때였습니다. 병원의 봄은 환자들이 간간이 끌고다니는 폴대에서 오는 것이란 생각이나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누구든 환자들 표정은 대체로 어두웠습니다. 그 표정 없는 표정의 어느 틈새를 비집고 봄이 오고 있을 것이란 생각 또한 그렇게 의미 없는 일은 아닐 것이란 혼자만의 생각에 젖곤 했습니다. 그러면 병실 안의 퀴퀴한 냄새도 봄이 빚는 누룩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쉽게 다가왔습니다.
퇴원을 하고 집에 와 있어도 서운한 생각은 나를 줄곧 따라다녔습니다. 수필가라는 이름만 걸어놓고 수필다운 수필을 쓰지 못한 뉘우침이 새삼 나를 힘들게 했습니다. 수필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닌 새롭고 참신한 의미를 찾아가는 탐색과 발굴을 위한 문학이라는 고집은 못나게도 병실 침대에 누워 있어도 변함없는 아집이었습니다. 수필다운 수필을 쓰지 못한 것은 세상을 지나치게 안이하게 보고 겉보기로만 훑어나간 탓이라는 뉘우침이 따라다녔습니다. 어제 본 세상은 오늘 본 세상이 아닌데 나는 미처 거기에 눈뜨지 못하고 수필을 합네, 하고 으스대었습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나는 또 이런 글에 부끄럽게 손을 대고 있습니다.
어쩌다 병은 질기고, 생각은 자꾸만 짧아지는 걸 지금 느끼고 있습니다. 이 느낌에서 벗어나고자 노력은 하지만 지금으로선 시일이 좀 더 나를 잡아 놓을 것 같습니다.
침침한 눈으로 앞산을 본다
그새 언덕이 누르스름하고 파르스름하다
나는 그 언덕까지 갈 수 없다
창밖 세상은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다
언덕 너머 하늘이 떠 있다
하늘의 일을 전혀 모르고
쓰다가 지우는 문장 몇 줄에 매달려
눈에 닿는 것만으로 세상을 본다
여든에 눈 뜨면 뺨 맞고
아흔에 눈 뜨면 당연히 뺨 맞는다는
시정 우스갯소리 듣는다
뺨 맞으러 아침에 눈을 뜨고
무슨 미련이 있어 이 구절을 쓴다
쓰다가 지우고 또 쓴다
요즘에 겪는 마음의 움직임입니다. 무슨 제목을 달까 궁리하다가 그냥 둡니다. 어저께는 딸아이가 원동 매화밭에서 찍어온 매화꽃을 휴대폰으로 구경했습니다. 딸아이는 지금 병간호를 하고자 멀리 미국에서 며칠 말미를 받아 와 있습니다.
봄을 위한 옳은 글이 되지 못하여 미안합니다. 내내 건승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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