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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수필과비평』[2019년 3월호, 통권209호 I 세상 마주보기] 소疏, 힘을 빼다 - 하창수

신아미디어 2019. 4. 29. 13:56

"관계가 원만하면 자연히 부드러워지고 여유가 생기며 중심이 서게 된다. 힘이 빠질 때 작용되는 원리다. 힘 뺌은 이완이고 내려놓음이다. 생각과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닫힌 문을 열어주며 통하게 한다. 힘을 뺀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깨달음과 합일, 즉 하나가 되는 길이다. 누군가에서 누군가로 이어지는."


 







   소疏, 힘을 빼다     -    하창수


   힘을 빼면 이완이 되고 기운이 온몸으로 찾아 든다.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된다. 소疏는 물꼬를 터주는, 통하게 한다는 뜻이다. 작년 말부터 막내아이가 학교폭력을 당해 피해자의 부모로서 해결책에 온 촉수를 곤두세웠다.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매듭이 풀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와 걱정에 휩싸여 긴장이 잔뜩 쌓였다. 뒤늦게나마 가족의 의미를 되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작은 일 하나라도 지나치지 않고 관심을 가지고 마음을 보듬어 주는 것이 삶의 한 방편임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삶의 긍정적인 순환방식이다. 

   앙상한 나뭇가지를 보면 나무가 힘을 뺀 모습처럼 보인다. 녹음이 왕성한 여름에는 활기찬 자태가 생동감을 주지만 잎을 다 떨쳐 낸 가지만 남은 형상은 보리살타와도 같다. 청정심 그대로 깔밋하면서도 아름답다. 나무의 성품을 본 듯하여 더욱더 그러하다.
   “힘을 빼세요.”
   “힘을 빼라니까요.”
   테니스를 치러 가면 코치가 하는 말이다. 요가를 배우러 가도 그러하고 골프와 서예를 하러 가도, 심지어 총을 쏠 때도 손목과 팔에 힘을 빼라고 한다. 참 이상도 하다. 가만히 살펴보면 무엇에 집중하거나 몰입할 때면 어김없이 힘을 빼라고 하니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모든 부분에서 알게 모르게 필요치 않은 힘을 주고 있는가 보다. 춤을 출 때도 그렇고 악기 연주를 할 때도 당부하는 내용이 힘을 빼라고 한다. 그러면 힘을 주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힘을 주고 빼는 데는 육체뿐만 아니라 심리적, 정신적 작용에도 영향을 미친다. 밖으로 드러날 때는 기분이나 감정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또한 우리 몸은 감정의 노예로 작용하기도 한다. 여기서 불필요한 힘이 가해지고 심하면 스트레스로 변한다. 따라서 부정한 에너지가 발생하여 신체에 긴장을 주며 온몸이 굳어진다. 이때 굳어진 근육들이 풀리지 않으면 탈이 나고 고통이 생긴다. 스스로 풀어 주지 못하면 약물이나 외부의 도움으로 해결하려고 애를 쓴다. 살아가면서 스트레스를 안 받고 살기란 힘든 세상이다.
   나무의 시간 속에는 헛된 일이란 없다. 숭고함이 깃들여 있다. 그냥 잎을 다 떨어뜨려 자신을 내려놓는다. 미련 없이 다 버리고 세상의 파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기다릴 줄 안다. 자기를 내세우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나서지도 않는다. 중심이 서 있다. 무엇이든 닥쳐오는 대로 온몸을 드러내고 아무 거리낌 없이 받아들인다. 걸림이 없다.
   힘을 뺀다는 것은 정체되고 갇혀있는 생각의 물길을 터주는 것이다. 하여 힘을 빼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되고 들리지 않은 것이 들리고 평소에는 느끼지 못하던 것들에 대해 느낌이 다가온다. 무슨 일이든 술술 잘 풀리고 관계에서 교감과 소통이 잘 이뤄지고 항상 여유로워진다. 자신의 주장을 뽐내지도 않으며 의견을 내놓더라도 옳다 그르다 따지지 않고 그냥 무심하게 주고받을 뿐이다. 운전을 잘하는 사람은 핸들에 손목의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부부 싸움에서도 한쪽에서 힘을 빼면 격렬하게 다투다가도 진정이 되는 것을 안다. 생각 감정의 막 속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우리는 평생 분별하는 그 틀 속에서 고통을 호소하며 자유롭지 못하고 끝내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산행은 나를 내려놓는 과정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실체가 없는 ‘나’, ‘나의 것’ 이라고 하는 생각 감정 오감을 방하착 하는 것이다. 나이는 숫자를 더해가고 마땅히 즐겨하는 운동도 없으면 체력을 단련하는 방편으로 손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산을 찾는 것이다. 처음은 호흡이 고르지 못해 애를 먹기도 한다. 어느 정도 체력 안배가 되면 명산 고찰을 찾아서 경치를 조망하는 기쁨과 약간의 사색으로 심리적 만족감을 얻는다. 하지만 말이다. 산이 좋은 친구가 될 때가 있다. 이제는 수려한 모습이 아니어도 좋다. 자그마한 앞산도 좋고 그저 오를 수 있는 한적한 곳이면 더 좋다. 산길을 걷는 자체가 소통이 되고 수행이 된다.
   자연 속에서 힘을 빼면 만물과 나의 근원이 한 곳인 것을 알아차리며 서로의 경계를 초월한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경험을 맛보게 된다. 진리가 그대로 현실세계로 구현된 것이 자연이다. 자연을 사랑하는 것은 절대계의 이치를 알아차리고 그 본성을 세상으로 그대로 드러내기 위한 구도의 여정이다. 자연 속에 내가 있고 내 안에 자연이 있다. 산을 받아들이면 나는 사라지고 산이 된다.
   자연은 마음이다. 마음은 내 주인이고 삶의 역사이자 박물관이다. 불속에 물의 씨앗이 있고 물속에 불의 씨앗이 있다. 아무리 힘들고 고통이 뒤따르더라도 그 속에는 기쁨과 환희의 씨알이 숨어 있다. 삶 안에 죽음이 있고 죽음 속에 이미 새 생명이 잉태된다. 그래서 인생은 역동적이다. 나아가 조금 더 세밀히 들어가면 현실 세계 안에서 지옥과 천국까지도 경험할 수 있다. 살아서 하늘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 죽어서 어떻게 하늘나라에 갈 수 있을까. 삶과 죽음은 양극단이 아니며 한 생명체이다. 때를 만나는 것이 삶이고 변화에 따르는 것이 죽음이거늘 보이는 데서 보이지 않는 데로 옮겨가는 일이 생사다.
   가파른 산을 올라갈 때만 힘 드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조그만 틈이 생겨나아릴 때도 시리고 아프다. 육체적으로 힘듦은 목표에 다다르면 카타르시스 해소와 순간적인 안도의 한숨이 생긴다. 형체가 없는 마음은 복잡하게 얽혀있는 연기 탓으로 쉽사리 잡히지도 않고 드러내 보일 수도 없다. 하지만, 이것도 툭하고 내려만 놓으면 언제 그랬느냐며 고요하고 텅 비워지기도 한다. 알아차림, 마음의 묘미가 여기에 있다.
   여기서 나는 고백한다.
   “홀연히 왔다가 홀연히 가는 것이 인간일진대 여기서 무슨 욕심을 내어 이 몸을 불편하게 하겠는가?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한다면야 잘 먹고 편안하게 즐길 수 있다. 친구와 좋은 술집에서 기분 좋게 보낼 수도 있다. 인연 따라 멋진 추억을 만들 수 있을지언정, 어찌 마음에서 우러나는 행복까지 살 수야 있겠는가.
   조금은 굴욕을 당할지라도 순간을 참을 줄 알고, 이유 없이 가해를 당하더라도 성내지 않는다면 반드시 큰 용기를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한가한 마음을 내어 비록 가난해서 불편함이 있더라도 마음 편한, 약간은 등굽은 한 그루의 소나무로 살고자 한다. 때로는 운문선사의 체로금풍體露金風을 화두로 삼으면서, 도연명의 자연과 함께하는 풍습과 스콧 니어링의 숭고한 삶의 정신을 배울 것이다. 이 얼마나 다행스럽고 입가에 미소가 감도는 일이 아니겠는가. 산다는 것이 별일로 허송해서는 안 되며 욕심보다는 양심을 앞세워 주위를 밝고 향기롭게 만들어가는 일이어야 한다. 나만 편안하게 즐기기보다는 함께 어울리고 나보다는 상대를 더 챙겨 줄줄 아는 대승보살로 살아야 하겠다. 삶은 내 마음에 달려있다. 올해의 봄날은 이 바람으로 맞이할까 한다.”
   모든 식물의 열매가 그러하듯 자기 자신을 버리지 않고서는 새 생명을 얻을 수 없다. 자신의 에고를 내려놓지 않고서는 자신의 참모습을 만날 수가 없다. 때로는 삶을 한 걸음 뒤에서 관조해 보면 하나가 될 때가 있다. 허나 일상 속에서는 핵심보다는 드러난 껍데기만을 가지고 옳고 그름을 가리려한다. 자신의 지식과 생각에 근거를 둔 틀 속에서 울고 웃고 하며 서로를 분별하고 인격을 평가기도 한다. 삶은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대화의 연속이다. 관계는 보이지 않은 연결고리에 의해서 작용되기도 하고 펼쳐졌다가 수축하면서 반복된다. 학교폭력, 부부싸움이나 산을 오를 때의 힘들어하는 일도 마음의 소통 문제이다. 관계의 역학 속에서 삶은 보다 성숙되어진다.
   인간은 자연 속에서 다른 생명체와 별반 다르지 않으며 단지 생각하고 지능지수가 조금 높은 결과로서 문명을 남긴 동물밖에 안 된다.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면 지극히 일상적인 과정이며 특별한 존재는 아니다. 개체의 자아 입장에서 보면 지구상의 특이한 존재로 보일는지 모르지만 한낱 먼지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을 너무 과대포장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지성을 최대 업적으로 자랑하는 노사 상가는 죽음을 앞에 둔 기로에서 유언으로 업적을 책으로 남기겠다고 한다. 끝까지 자신의 관념, 사상이 위대함을 전하고 싶은가 보다. 순수한 존재를 직관할 수만 있다면 삶의 전부가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 텐데 말이다.
   관계가 원만하면 자연히 부드러워지고 여유가 생기며 중심이 서게 된다. 힘이 빠질 때 작용되는 원리다. 힘 뺌은 이완이고 내려놓음이다. 생각과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닫힌 문을 열어주며 통하게 한다. 힘을 뺀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깨달음과 합일, 즉 하나가 되는 길이다. 누군가에서 누군가로 이어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