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면 지하도에서 복닥대는 사람들, 지하철 안에서 핸드폰 속에 코를 박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원자화된 외로운 현대인이다. 숲에 가 보아라. 어디 숲이 외로워 보이던가. 많은 나무 하나 하나가 더불어 이웃하고 있지 않던가. 이웃을 실험하다니, 속이 울렁거려 지금 해운대 장산숲에 나서는 참이다."
내 안의 이웃 - 신창선
오랜만에 고향 동네를 찾는다. 두 개의 커다란 돌하르방이 있는 곳을, 지나가는 사람에게 묻는다. 모두가 모른다며 고개를 젓는다. 그냥 돌아갈까하다 나이 많은 노인한테 물었더니, 바로 당신이 서 있는 곳이라며 환히 웃는다. 돌하르방도, 땅뺏기하던 골목길도 보이지 않는다. 흙냄새가 전혀나지 않는다. 세배하러 다녔던 까만 기와집도 사라지고 없다. 정신문화의 인큐베이터였던 이웃이 사라지다니, 추억이 무너져 내리고 아슴한 잔상으로만 남다니, 참 난감한 일이다.
발전의 신화만을 좇아온 현대인은 떠나기만 하는 성급한 여로의 인간이며, 돌아갈 고향을 잃은 사람들이다. 지금 삶이 영위되고 있는 정신문화의 원천인 이웃이 영영 사라지고 만 것일까.
인간은 공간적 존재이다. 그러나 현대인은 아무데나 철골로 칸막이 치고, 아파트라는 고층 공간 안에 갇혀 산다. 고향의 흙냄새를 잃어버리고, 이웃간의 결속의 끈, 소속감을 망각한 채 허상의 공간 속에 살고 있다. 이웃과의 단절의 고랑은 의외로 깊게 파여 있어, 앞집 사람이 고독사해도 그 상황을 인지하지 못해 몇 달 후에 주검이 발견되기도 한다. 이웃이 없어진 대가인 잔혹한 자화상이 곳곳에 숨어 있다. 디지털 사회, 정보시대, 사이버 공동체가 대세인 현실은 이웃의 정을 보험회사나 신용보증회사에서 대행하는 삭막한 세상이다. 시대의 흐름을 되돌릴 순 없겠으나, 반대급부로 외롭고 쓸쓸한 사람이 많아지는 역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세상은 자꾸 황폐해져 가고, 신화 속의 신들마저 죽어가고, 대지가 파괴되고, 물신物神이 지배하는 지금, 나의 이웃은 누구인가.
디지털 문화가 한창 발아할 무렵의 멜로 영화 <접속>을 회상해 본다. 내가 가끔 들르는 도서관 길목의 벚꽃 골목처럼 특별함이 있어 싱그럽게 다가온다. 영화의 흥행 동력은 당시의 트렌드를 리얼하게 반영한 통신이다. 네트워크상에서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 주인공 남녀의 대화는 솔직하고 꾸밈이 없다. 익명성의 악용은 전혀 느낄 수 없다. 통신을 하면서 상대와의 이미지를 만드는 풋풋한 사연에 내가 직접 참여하는 느낌이 오래도록 남아 있다. 사이버 이웃이 현실의 이웃이 될 수도 있다는 강한 흡인력은 오늘의 사이버세상을 예견하고 있다.
요즈음은 인터넷상에서 관계를 맺으며 정보를 교류하는 사이버 이웃이 보편화되고 있다.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을 탄생시킨 트위터만이 아니라 블로그, 각종 사이버 사이트가 세계 곳곳의 소식을 전하면서 세계를 이웃처럼 여기는 사이버 시대이다. 사이버 공간에서의 이웃은 시․공간, 나이, 지연, 학연, 지식 정도, 사회적 지위 따위에 구속되지 않고 자신의 의사를 강하게 나타낼 수 있는 평등한 기회가 주어진다. 사이버 공간에서의 개인의 정체성은 표현되는 모습 그 자체요, 상징적 의미이기에 전혀 구속적이지 않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서로 다른 모습이 되더라도 개인의 정체성은 여전히 존재하기에 퍽 자유스럽다.
디지털과 인터넷이 일상이 된 지금, 사이버 공동체의 가치가 중요하게 대두되고 있다. 가까운 예로 사물인터넷, 각종 동호인 사이트, 다양한 커뮤니티 따위는 결코 허구의 공간에서만 머무르지 않는다. 삶의 백과사전 같은 곳이기도 하고, 현실 세계의 일부로 나타나기도 한다. 현실의 반영이자, 확장인 셈이다. 인터넷은 사람이 살아가는 공간이 된 것이다. 감정과 정서가 나름대로 형성되는 문화공간이기도 하다. 데이터베이스로서, 미디어로서, 네트워크로서, 생활세계로서의 사이버 공간이 현실세계를 사이버화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렇기는 하나 사이버 이웃의 편리함 속에 마음 한쪽이 허전하기만 한 까닭은 무엇일까.
내 어렸을 적의 이웃은 좋을 때나 싫을 때나 늘 함께하는 끈끈한 상호의존적 관계였다. 내가 경험한 이웃이라는 갤러리에는 개인은 이웃의 한 부분이고, 이웃은 자아의 부족한 부분을 메워주며 배려하는 모습으로 걸려 있다. 오늘날의 사이버 이웃은 어떤가. 사이버 이웃의 커다란 자유는 익명성에 있다. 이 익명성은 참가가 자유롭지만 싫으면 나가버리는 것도 자유여서 정신적 상호 위안이 매우 약하고, 돌발적이고 황당한 경우가 발생해도 속수무책이다. 정치적 이슈, 음란물 배포, 악성 댓글 등에 대처하고자 인터넷 실명제를 거론하고 있으나, 사이버의 특성인 네티즌의 긍정적 자아실현 가능성을 무화시키며, 새로운 사이버 공동체의 건설에도 실패하게 된다는 이유로 실현 가능성이 희박해 보인다. 그럼, 어찌해야 하나. 화가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 그림이듯이, 이미 비틀어진 이웃을 비틀기만 하지 말고 밖과 안이 섞여 들더라도 같이 가면서 독립된 개체로서의 이웃, 내 안의 참된 이웃을 죽을 때까지 만들어 가야 하지 않을까.
어느 철학자의 ≪노자≫ 강좌가 상당 기간 인기를 끈 적이 있다. 날마다 쏟아지는 맹목적인 정보의 강요에 염증을 느낀 저항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디지털이란 경전을 읽으며 사이버 신神에게 경배하는 하이테크라는 종교에 저항하는 몸짓이었을 것이다. 사이버 이웃이 생활환경을 편리하게 했을지는 몰라도 오히려 사람이 그리워지는 역설적인 현실이잖은가. 모든 게 변해도 생명사상과 인간의 존엄성은 변하지 않아야 한다. 첨단과학도, 예술도 그 존재 가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강처럼 나무처럼如江如木 자연 속에서 자란 나무나 강물이 아름답듯이 인간도 그럴 것이다. 내가 시작된 곳, 자연은 아름답다. 아침이 아름다운 건 아직 어둠이 남아 있기 때문이요, 저녁노을이 아름다운 건 다가오는 어둠 속에 아직 빛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빛과 어둠이 아름다움이듯이 예전의 이웃이건 사이버 이웃이건 자연을 화두로 삼으면 참 이웃이 현현하지 않겠는가.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7인조 보이그룹인 ‘방탄소년단’이 전 세계의 인터넷을 달구고 있다. 미국 빌보드음악사에서 “과거의 비틀즈와 견줄 만하다.”고 논평하고 있을 정도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방탄소년단의 노래와 춤은 우리 조상들의 풍류도의 유전인자가 그들의 영혼에 달라붙어 쉽게 복원된 게 아닌가 싶다. 자연 만물과 교유하면서 생명의 리듬을 만들어냈던 풍류도의 음악과 춤이 현대적으로 변형되어 그들에게 환생되어 나타난 것이 아닐까. 우리의 가슴에 잠복되어 있는 신명문화가 되살아나 자연과 생명의 리듬에 합일하는 게 참 이웃에 접근하는 방법이 된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나, 살아보니 늙는 건 잠깐임을 알겠다. 모든 건 지나간다는 사실도.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놓치고 사는 것이 많은 게 인생이지 싶다. 하기에 친할수록, 익숙할수록 속도가 아니라 새롭게 바라보는 방향이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사이버 이웃 때문에 아름다웠던 이웃을 영영 잃어버려 멀미하기 전에 다시 땅냄새를 불러들이자. 자연은 늘 새롭다. 자연 안에서 함께하는 게 진정한 이웃 아니겠는가.
서면 지하도에서 복닥대는 사람들, 지하철 안에서 핸드폰 속에 코를 박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원자화된 외로운 현대인이다. 숲에 가 보아라. 어디 숲이 외로워 보이던가. 많은 나무 하나 하나가 더불어 이웃하고 있지 않던가.
이웃을 실험하다니, 속이 울렁거려 지금 해운대 장산숲에 나서는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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