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로 무장한 채 완고하게 닫힌 우리 집 문을 바라본다. 진정한 ‘허들링’의 시작은 딱 한 걸음의 온기인지도 모른다. 이 문을 열지 않고 어떻게 저쪽으로 건너갈 것인가."
허들링 - 노혜숙
‘선희네’는 어머니의 각별한 이웃이었다. 마루 덧문을 열면 그 집 싸리문이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살았다. 사람들은 큰딸 이름을 붙여 ‘선희네’라고 불렀다. 얼굴이 살짝 곰보였던 ‘선희네’는 하냥 웃음을 달고 살아서 사람 좋다는 소리를 들었다. ‘선희네’ 말고도 ‘애자네’, ‘미원네’ 모두 우리집엘 자주 드나들던 어머니의 친구이자 이웃이었다.
‘선희네’는 마실 오는 횟수가 잦았다. 주고받는 이야기도 나직나직 은밀하고 깊었다. 한 번도 입 밖에 낸 적이 없었지만 나는 자연스럽게 ‘선희네’가 어머니의 가장 가까운 친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선희네’와는 남편 이야기를, ‘애자네’와는 시댁 이야기를 많이 했다. ‘미원네’는 해마다 땅 산 이야기를 해서 은근히 어머니의 심사를 불편하게 했다.
동지가 지나고 뒷개울이 꽝꽝 얼어 겨울이 깊어지면 우리 집은 동네 사랑방이 되었다. 살얼음 뜬 동치미에 삶은 고구마를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마을의 한해살이를 모두 알 수 있는 자리였다. 이따금 국방색 담요를 깔고 민화투를 치기도 했는데 화투짝을 내려치며 쏟아내는 수다에는 달리 해소할 길 없는 여인네들의 하소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나는 메주가 익어가는 건넌방에 배를 깔고 엎드려 <피노키오> 같은 동화를 읽으며 왁자하게 건너오는 동네 이웃들의 웃음소리를 듣는 게 좋았다.
어머니와 이웃들은 일상을 공유하고 들일과 애경사를 품앗이하면서 함께 늙어갔다. 산골마을의 겨울은 결코 외롭지 않았다.
“오늘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여러 날 만에 발견된 노인의 주검 곁에 남겨진 일곱 장 메모의 내용은 똑같았다. 누군가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다 홀로 죽어간 사람. 수년 전 보도되었던 가슴 아픈 뉴스는 이제 일상이 되었다.
나는 앞집에 사는 여자의 얼굴을 모른다. 우연히 현관 앞에서 눈인사를 몇 번 나누었을 뿐이다. 만약 거리에서 만난다면 모르는 사람처럼 지나치고 말 것이다. 상대방도 비슷한 상황일 거란 짐작이다. 열흘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나도 그녀가 우리 집 문을 두드릴 일은 없지 싶다. 앞집에서 사람이 죽어 썩어가도 서로 모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어쩌다 그 집에서 청소기를 돌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웃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기척을 그렇게 확인한다. 완강하게 차단된 벽 저쪽은 이웃이 아니라 러시아에 살고 있는 무명씨만큼이나 먼 타자의 세계다. 하긴 평생 한 이불을 덮고 산 사람도 먼 이웃이 된 마당에 이름도 모르는 앞집 여자와 정다운 이웃을 꿈꾸는 건 언감생심인 일인지 모른다.
젊은 연인이 전동차에 탄다. 눈빛에 달달한 기운이 넘친다. 코가 닿을 듯 바짝 붙어 선다. 그 거리도 아쉽다는 듯 남자가 여자의 볼을 어루만진다. 빈자리가 생기고 두 연인이 자리에 앉는다. 앉자마자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낸다. 볼을 어루만지던 손을 거두어 스마트 폰을 어루만진다. 여자 역시 스마트 폰을 꺼내 시선을 붙박는다. 가끔씩 머리를 맞대기도 하지만 여전히 시선은 스마트 폰에 붙들려 있다.
두 사람은 각기 다른 가상의 공간을 유영하고 있다. 특별히 급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닌 듯싶다. 넘겨다보면 그렇고 그런 일상의 이야기들이 오간다. 수시로 공감을 확인하고 의미 없이 하트를 누른다. SNS를 통한 공감 범람시대, 그럼에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공감의 허기에 시달린다. 젊은 연인들도 옆에 있는 애인보다 가상공간의 인정에 더 집착하는 모양새다. 애인 없이는 살아도 스마트 폰 없이는 못 산다고 할 법한 세상, 흥미로운 이웃의 변천사라 해야 할까.
영하 50도가 넘는 극지에서 펭귄들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영상 속에는 수천 마리의 펭귄들이 서로 바짝 몸을 붙이고 얼음 밭에 서 있었다. 둥근 원의 형태로 울타리를 만들어 안쪽의 펭귄들을 보호했다. 울타리 바깥쪽 온도와 안쪽 온도는 무려 10도 가까이 차이가 난다고 한다. 체온이 떨어지면 안쪽 펭귄들과 교대를 해가면서 같은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공존의 비결은 이웃과의 ‘허들링’, 연대였다. 어머니의 겨울이 외롭지 않을 수 있었던 것 역시 이웃과의 ‘허들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허들링’의 결핍 때문에 또 한 노인은 냉기 속에 죽어간 것 아니겠는가.
비밀번호로 무장한 채 완고하게 닫힌 우리 집 문을 바라본다. 진정한 ‘허들링’의 시작은 딱 한 걸음의 온기인지도 모른다. 이 문을 열지 않고 어떻게 저쪽으로 건너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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