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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인간과문학 2019년 봄호, 권두에세이: 길밖으로부터의 사유] 동백冬柏 - 임승빈

신아미디어 2019. 3. 18. 11:35

"동백의 그런 고요로 나는 지금 사념의 창을 닦는다. 아니, 그 사념마저 선홍빛으로 활활 타오르는 나만의 고요이게 한다."

 

 

 

 

 

 

   동백冬柏             /  임승빈

 

   동백이 피었다. 벌써 3년째다. 구해 오고 이태 동안은 꽃이 없다가, 재작년에 처음 다섯 송이가 피더니, 작년엔 두 송이만 피었다. 내륙의 날씨에 적응을 못하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었는데, 올해는 꽃망울이 무려 열다섯 개나 맺혔고, 그중에 지금은 여섯 번째 꽃이 막 피어나고 있는 중이다.
   5년 전 여름에 거제에 사는 돈묵 형을 찾아갔다가 거기에서 얻어 온 것이다. 가기 전에 전화로 동백을 좀 구해 달라고 했더니, 꽃집에서는 토종을 구할 수가 없었다면서, 뜰에 심겨져 있던 것을 형이 직접 캐 준 것이다. 건네주면서 형은 ‘물을 좀 자주 주고, 아주 추운 날이 아니면 그리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어떻게든 바깥바람을 많이 쐴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는 말을 꼬리로 달았다.
   동백이 필 때가 되면, 나는 아침저녁으로 베란다를 기웃거린다. 수백 수천 송이가 한꺼번에 피는 것이 아니라, 빨간 꽃망울이 뾰족이 솟아나고, 한 송이가 피었다가 두 송이 세 송이가 함께 피고, 그러는 사이 처음 피었던 꽃은 또 소리 없이 지는 모습이 여간 고고해 보이지 않는 때문이다.
   동백을 좋아하기는 그미가 먼저다. 그래서 겨울이면 우리는 심심치 않게 그 먼 강진까지 동백 구경을 다녀오곤 했다. 서해안에도 동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늦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언제고 동백을 볼 수 있는 것은 오랜 경험상 강진이 가장 적합한 곳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언젠가 강진이 고향인 김선태 시인과 백련사 동백숲을 찾은 적이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김 시인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전 가끔 아무 생각 없이 이 숲을 거닐곤 해요. 그런데 여기 동백나무들은 그 줄기가 무슨 상처의 흔적처럼 이상하게 울퉁불퉁 불거져 있어요. 꼭 무슨 혹 같기도 하구요. 그래서 어떤 땐 괜히 숙연한 느낌마저 들 때가 있어요.
   그러나 제가 가끔 여기를 찾는 것은 더 없이 편안한 때문이에요. 그럴 때면, 아무데나 걸터앉아 시도 생각하고, 세상 살아가는 사람살이도 생각하곤 해요. 저 나무들에겐 무얼 물어도 ‘삐이 삐이’하는 동박새 울음소리만 들려줄 뿐이니까요.”
   그때 나는 동박새 울음소리를 처음 들었다. 몇 번이고 백련사에서 다산초당 쪽으로 내려가는 길에 그 동백숲을 만나기도 했지만, 나무들의 모습에서 그렇게 숙연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 동백숲에서 김선태 시인이 생각한 시는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사람살이에 대한 그 어떤 의문을 시인은 동백숲에 던져 보고 싶었던 것일까.
   담양 소쇄원엘 갔다가 애양단愛陽壇을 보았다. 입구에서 대봉대를 지나자마자 ‘愛陽壇’이라는 해서체 글씨가 새겨진 오석이 담장에 박혀 있고, 그 옆에는 동백나무가 한 그루 심겨져 있었다. 무슨 뜻이냐고 묻자, 해설사는 전혀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볕이 가장 좋은 곳이잖아요. 그래서 소쇄공 양산보가 이곳에서 늙으신 어머니 머리를 감겨, 그 좋은 볕에 말려 드리곤 했다고 해요. 동백나무는 아시죠? 옛날 사람들은 왜 동백기름으로 머릴 단장했다잖아요.”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내 어머니를 생각했다. 돌아가시기 전, 고관절 골절로 거의 5년여를 누워만 계셨던 어머니. 하두 베개에 문대서 언제나 뭉글어지고 헝클어진 채였던 허연 머리 모습을 떠올리면서 한참이나 가슴이 저렸다.
   지금도 내 선친을 기억하는 분들은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를 당신의 애창곡으로 꼽는다. 그 〈동백아가씨〉를 나는 초등학교 시절 딱 한 번 들은 적이 있다. 거나해서 들어오신 당신께서 코트도 벗지 않은 채 잠옷 바람인 동생과 나를 붙들고 그 노래를 부르셨던 것이다. 그때 당신은 똥그랗게 뜬 두 눈에 눈동자를 미간 쪽으로 모으고, 입술마저 동그랗게 오므린 채 노래를 부르셨는데, 그 후에도 평생 보지 못했던 그 이상한 표정과 노래 때문에 동생과 나는 배를 잡고 데굴데굴 구를 수밖에 없었다. 밖엔 눈이 왔는지, 당신의 코트에서는 군데군데 젖은 한기가 기분 좋은 당신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어떻게 당신의 애창곡이 되었을까. 남들도 다 기억하는 그 노래를 나는 왜 평생 한 번밖에 듣지 못했을까. 그 노래를 부르면서 당신은 왜 그런 이상한 표정이었을까. 노랫말대로 동백은 당신께 빨갛게 멍이 든 그리움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면, 동백은 도발이다. 추운 겨울에 피는 꽃이라는 점에서 겨울과 꽃의 통념에 대한 도발이고, 롤랑 바르트 식으로 말하면, 그렇게 전복적인 역설(逆說, paradox)이다. 그런 점에서 선친이 부른 그 〈동백아가씨〉는 그리움에 대한 은유적 전복이고, 당신의 그 이상한 표정은 일상적 이미지에 대한 전복이면서 동시에,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위한 나름의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그런 동백이 내겐 고요이다. 그냥 고요가 아니라, 말하지 않음으로 오히려 더 크게 넘쳐나는 그런 고요이다.
   무섭게 눈발이 흩날리는 날, 베란다의 동백에서 나는 그런 고요를 보았다. 몸부림치듯 흩날리는 세상의 그 많은 말들도 동백에 와서는 결국 그만큼 더 선명한 선홍빛 입술의 고요일 수밖에 없는. 그러니까 동백은 겨울의 그 매서운 북풍한설은 물론, 여름날 폭포처럼 쏟아지던 햇빛과, 옥수수밭을 사운대며 내리던 빗소리와, 세상을 가득 채우고도 남던 쟁쟁이는 매미 소리와, 백련사 동백숲을 ‘삐이 삐이’ 날아다니던 동박새 소리들까지도 다 몸 안에 쑤셔 넣은, 몸 자체가 온통 소리로만 뭉쳐진, 그렇게 폭발 직전의 고요인지도 모른다.
   동백의 그런 고요로 나는 지금 사념의 창을 닦는다. 아니, 그 사념마저 선홍빛으로 활활 타오르는 나만의 고요이게 한다.



임승빈님은 《월간문학》 신인상 시부문 당선(1983), 시집 《흐르는 말》 등 다수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