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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 월간 좋은수필 2018년 8월호, 신작수필26인선 I 둥지 - 이혜경

신아미디어 2019. 3. 8. 09:49

"오늘따라 비둘기가 제법 오래 자리를 비운다. 혹시라도 거처를 옮겨 갔기를 기대하며 들여다보니 둥지 옆에 작은 열매 몇 알이 놓여있다. 새끼들이 다니러 온다는 기별을 받고 멀리까지 먹이를 구하러 나간 것일까. 모처럼 가족이 모여 회포를 푼다면 평소보다 몇 배는 시끄러울 것이다. 끈질긴 우리 인연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둥지          /    이혜경

 

   악연도 인연이라면 우리는 보통 사이가 아니다. 왜 하필 우리 집이었을까? 수백 집이 창을 맞대고 모여 사는 아파트에서 다른 집도 많은데 말이다. 허락도 없이 발코니를 점령한 비둘기 가족과 동거한 지도 어느덧 두 달이 넘었다.
   몇 달 전, 저층으로 집을 옮긴 뒤부터 생각지도 못한 불청객이 찾아왔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비둘기 한 쌍이 거실 창 난간에서 쉬었다 가곤 했다. 하루는 유난히 이상한 소리가 들려 내다보니 비둘기가 짝짓기를 하는 중이었다. 더 이상 손을 놓고 있어서는 안 되겠다 싶어 다음부터는 날아오는 즉시 경고를 보냈다.
   눈앞의 비둘기에게 정신이 팔린 사이 눈길이 닿지 않는 구석에서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오랜만에 베란다 청소를 하려고 방충망을 열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에어컨 실외기와 방충망 사이에 비둘기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언제 물어다 놓았는지 나뭇가지들과 나뭇잎이 불룩하게 쌓여 있었다. 창을 쾅쾅 두드려 가라고 신호를 보냈지만 빤히 보며 눈동자만 굴릴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어미가 알을 품는 중이었다.
   나에게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이 아니라 해를 끼치는 새로 보일 뿐이어서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찜찜한 마음이 가시지 않아 베란다를 드나들며 동태를 살폈다. 그런데 아무리 겁을 주어도 비둘기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이따금 수컷이 찾아와 알을 지키는 어미 비둘기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고 갔다.
   보름쯤 지났을 무렵 전과는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막 알을 깨고 나온 새끼가 우는 소리였다. 깃털이 없어 맨살이 그대로 드러난 몰골이 새라기보다 작은 핏덩이에 가까웠다. 한시라도 빨리 쫓아내고 싶은 달갑지 않은 존재였지만 어린 생명까지 태어난 마당에 야박하게 내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새끼가 얼른 자라서 다른 보금자리로 찾아 가도록 기다리는 쪽으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내키지 않는 동거였지만 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지내면서 선입견이 조금씩 허물어졌다. 비둘기가 새끼를 거두는 모습은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새끼가 어렸을 때는 어미가 곁을 지키고 아비가 먹이를 구해 날랐다. 살뜰한 보살핌 덕분에 민둥산이던 몸이 깃털로 빼곡히 채워졌고 날개도 제법 커졌다. 부쩍 먹성이 좋아지자 어미도 자리를 자주 비웠다. 홀로 남은 새끼들은 둥지 옆을 걷기도 하고 날개를 퍼덕이며 나름대로 바쁜 일상을 보냈다.
   며칠 전에는 창이 훤해진 줄도 모르고 잠에 취해 있었다. 창밖이 유난히 조용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곯아떨어진 것이다. 갑자기 머리를 스쳐가는 느낌이 있어 종종걸음으로 베란다로 나갔다.
   여느 때와 다르게 그곳에는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방충망을 열어보니 둥지가 텅 비어 있었다. 촘촘한 방충망 사이에 낀 깃털과 흩어진 나뭇가지 부스러기만 남았을 뿐 어디에도 비둘기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얼마 전부터 새끼들의 몸놀림이 부산스럽다 싶었는데 드디어 비행에 성공한 모양이었다.
   한때는 나도 부모님의 둥지에 머물던 어린 새였다. 먹고 입는 것은 물론이고 바깥세상의 비바람을 막아주는 큰 날개에 기대 따뜻하게 지낼 수 있었다. 둥지를 떠나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도 살뜰한 보살핌 덕분이었다. 넓었던 둥지가 비좁게 느껴질 정도로 날개가 자라고 먼 곳을 볼 수 있을 만큼 시야가 트였을 때 나는 날개를 펼쳐 날아올랐다. 짝을 만나 새로운 둥지를 틀면서 나 또한 자식을 돌보는 어미 새가 되었다.
   빈 둥지를 확인하고는 이제 마음 편히 바깥바람을 들여놓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비둘기가 머무는 동안 악취와 세균 걱정 때문에 내 집 문도 마음대로 열지 못해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침마다 시끄러울 일도 없을 테니 늦게까지 꿀잠을 즐길 수 있을 터였다.
   평화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귀를 파고드는 익숙한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황급히 베란다로 달려가 보니 비둘기가 와 있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새끼 없이 암수 두 마리만 돌아왔다. 염치도 없이 다시 진을 친 비둘기에게 화가 치밀어 몇 번이나 쫓아냈지만 잠시 피하는 시늉만 할 뿐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그 뿐이 아니었다. 영영 다른 곳으로 가 버린 줄 알았던 새끼들도 잊을 만 하면 한 번씩 찾아왔다. 전처럼 내내 같이 있지는 않았지만 가끔 들러 쉬어 갔다. 북적이면 북적이는 대로 조용하면 조용한 대로 암수 두 마리는 한결같은 모습으로 둥지를 지켰다.
   비둘기 가족을 보며 문득 내가 떠나온 옛 둥지를 떠올려 본다. 높낮이가 다양한 여섯 식구의 목소리가 섞여 늘 시끌벅적하던 둥지가 적막강산으로 변한 지 오래다. 이가 빠진 것처럼 듬성듬성 빈자리가 생겨나 그 틈으로 바람이 새지만 부모님은 아무 내색도 않는다.
   가끔 친정에 머물 때면 드러누워 뒹굴기도 하고, 차려 준 밥을 넙죽넙죽 받아먹으며 어린 새끼로 돌아가곤 한다. 그렇게 힘을 얻어내 둥지로 돌아와 꿋꿋하게 어미 노릇을 한다. 나 또한 언젠가는 품고 있는 자식을 떠나보낼 날이 올 것이다. 사람이나 새나 적당한 때에 자기의 둥지를 떠나가고 또 떠나보내기도 하는 것이 정해진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오늘따라 비둘기가 제법 오래 자리를 비운다. 혹시라도 거처를 옮겨 갔기를 기대하며 들여다보니 둥지 옆에 작은 열매 몇 알이 놓여있다. 새끼들이 다니러 온다는 기별을 받고 멀리까지 먹이를 구하러 나간 것일까. 모처럼 가족이 모여 회포를 푼다면 평소보다 몇 배는 시끄러울 것이다. 끈질긴 우리 인연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혜경 님은 《수필세계》 등단(2014), 천강문학상 수필 대상(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