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ㄴ 미완의 유리창 쪽지였다. 글자가 닦은 ‘어머ㄴ’라는 투명한 길을 따라 두 손을 흔드는 어머니가 점점 작아져만 갔다."
쪽지 / 이호철
나는 쪽지공公이다. 아는 사람들이 붙인 애칭이다. 내 아이들이 글을 깨우치면 쪽지를 건넸다. 주로 틈을 보아 필통에 넣어 두었다. 필통을 열지 않고는 하루라도 학습을 이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칭찬은 어깨를 두드리며 말로 하지만 격려는 짧은 글로 하는게 효과가 나았다. 어디까지나 내 경험에서 하는 말이다.
주관이 선명하여 개성이 강한 첫째 아이에게 처음으로 필통 안에 넣은 쪽지였다.
- 유치원에서 좋은 친구들을 만나 보거라. 아빠.
고교에 들어가자 이런 쪽지를 담았다.
- 일생에서 중요한 시기다. 힘을 쏟길 바란다.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았을 때 가볍게 등을 두드렸다.
“수고 많았다.”
그날 큰아이의 오른쪽 호주머니에 쪽지로 띠를 두른 포상금을 찔러 두었다.
둘째가 태어나고 셋방살이에서 벗어났다. 초등학교 가까운 아파트로 이사하고 둘째가 입학했다. 붙임성이 있는지 집으로 찾아오는 친구가 늘어났다.
- 선생님 말씀에 귀를 기울여라.
입학 기념으로 ‘핸들식연필깎기’를 사주었다. 신기해서 애지중지하던 ‘람보기관총’을 치우더니 종일 연필만 깎았다. 심을 부러뜨리고 또 깎아 몽당연필을 만들었다.
대학입시 지옥의 후반부에 박차를 가하더니 중국어문학과에 들어갔다. 나로서는 부족한 고전문학을 채워줄 실력자가 나왔으면 하는 바람도 은근히 있었을 테다. 아이도 어릴 때 서당에 다녀서인지 4년 동안 자신감을 보였다.
- 학업을 성취하여 아빠를 좀 도와줘.
대학원 유학 중에는 현지 가이드 노릇을 제대로 해주었다. 덕분에 중국 유람은 구석구석 해보는 호사를 누렸다. 아내가 더 즐겼다.
“나도, 중국말을 둘째의 반에 반만 해도 바가지를 안 쓸 텐데. 호호.”
셋째는 누나 둘보다 쪽지를 더 많이 받았다.
- 학창시절을 후회하지 않도록 알차게.
- 올바른 선택을 하면 힘껏 달려라.
- 친구라면 절대로 다투지 말고 양보해라.
- 어디서 무엇을 하던지 필요한 재목材木이 되어라.
이런 일도 있었다. 방학 중에 기숙학원을 다녔는데 집에서 교육방송으로 공부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한마디로 잘랐다.
“이 녀석아. 친구들 만나고 싶어 꼼수부리는 줄, 모를 줄 알아. 어림없어.”
그러자 막내는 각서라도 쓰겠다고 맞섰다. 나도 배수진을 쳤다.
“너, 혈서라도 쓸 수 있어!”
“그래, 쓸 거야.”
사춘기 아들의 볼멘소리에 엄마의 낯빛이 변했다. 마음 ‘心’자를 쓴다고 화장실에 들어 간 지 얼마 안 돼 문이 열리자 엄마의 얼굴이 밝아졌다. 포기하고 되돌아 나오는 줄만 알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왼손 새끼손가락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아빠, 심방心房 안에 점이 두 개야? 세 개야? 빨리!”
내가 처음으로 받아 본 붉은 색의 쪽지였다. 그것도 식당용 냅킨에 쓴 단심丹心이었다. 이 사건은 논산훈련소에 입소하는 연병장에서 위로의 말로 대신하며 웃었다.
우리 집에서는 생일이 주요행사로 자리 잡은 지가 오래 되었다. 성인들이라 생일잔치의 비용은 당사자가 고마움의 표시로 부담하였다. 참석자는 축의금에다 쪽지를 건네는 게 전통이었다. 사위들도 쪽지 문화의 가풍에 차츰 동화되어 갔다.
- 세상에서 너를 만남은 제일 큰 선물이었단다.
- 두고두고 좋은 선물로 남겠습니다.
나를 기억하고 내 손길이 닿는 자리에는 쪽지가 마음을 전한다. 요즘은 대학찰옥수수나 사과농사를 짓다보니 택배를 보낼 때 사인펜으로 쓴 쪽지를 담는다. 포장을 열면 만나는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쪽지일지 모른다.
- 맛있게 드시고 건강하며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달래강 농부.
- 마음으로 받으시고 좋은 책 만드세요. 괴산에서
가슴이 깨어있는 동안 잊어본 적이 없는 쪽지가 있다. 꽃다운 젊은 병사 시절에 국가의 부름으로 베트남 전쟁터로 가는 길이었다. 나라에서 명령을 내렸는데 누가 감히 다른 길을 도모할 수 있겠는가. 1월의 서울 용산역은 영영 못 볼지도 모르는 조국 땅을 떠나는 장병들의 마음처럼 꽁꽁 얼어붙었다. 어머니의 차가운 손을 부여잡고 이별의 순간을 맞았다. 온통 울음바다였다. 창문마다 맞잡은 손에 묶여 기차가 움직일 수가 없었다. 헌병들의 호루라기도, 호송단의 제지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 초강수로 창문 전체를 내리게 했다. 군용열차가 기적을 길게 울렸다. 이어 증기를 내뿜으며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객실 안의 유리창은 곧바로 뿌옇게 결로 현상이 일어나 밖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급히 습한 유리에 손가락으로 글자를 만들었다.
- 어머ㄴ
미완의 유리창 쪽지였다. 글자가 닦은 ‘어머ㄴ’라는 투명한 길을 따라 두 손을 흔드는 어머니가 점점 작아져만 갔다.
이호철 님은 《에세이문학》 등단· 동아일보 《신동아》 논픽션 당선. 수필집: 『소금으로 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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