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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 월간 좋은수필 2018년 8월호, 신작수필26인선 I 마지막 자화상 - 이영덕

신아미디어 2019. 3. 7. 09:26

"과거에 희망하던 모습이 아니라고 절망하며 지금의 모습을 부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교만인가. 노 화가의 커다란 웃음과 주름진 얼굴 속에서 빛나는 현자의 눈을 가진 그의 자화상은 그 어느 작품보다 더 큰 깨달음을 나에게 주었다. 비록 낡은 앞치마를 입은 늙고 작아진 몸이지만 세상을 많이 알았다는 듯 환하게 웃고 있는 나의 마지막 자화상을 그려본다."

 

 

 

 

 

   마지막 자화상        /    이영덕

 

   제욱시스로 분한 자화상….
   모처럼 주어진 한가한 오후, 차 한잔과 함께 화보집을 뒤적이고 있었다. 흔히 보아왔던 유명한 그림들을 건성 넘기다가 구석에 조그맣게 인쇄되어 있던 이 그림을 본 순간 알 수 없는 충격과 함께 많은 궁금증이 밀려왔다. 누가 자신의 이런 모습을 그리게 했을까, 누가 왜 그렸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책을 앞으로 끌어당겼다. 노인의 초상화였다. 치아는 성치 않았고 등이 구부정하게 굽은 노인은 화가용 작업복을 걸치고 웃고 있었다. 뒷배경의 깜깜한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듯 하기도 하고 밝은 빛 쪽으로 나오는 듯하게 비스듬히 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림 속 노인은 빛의 화가로 알려진 거장 렘브란트이고, 그의 마지막 자화상이었다. 웃고 있는 주름진 얼굴 속에 눈빛은 예리하게 나를 향해 있었다. 나를 비웃는 듯한 웃음, 얼마 전 외면했던 나의 자화상이 떠올랐다.
   낡은 앞치마를 두르고 찡그린 얼굴에 머리는 땀에 젖어 힘겹게 청소하고 있는 여자와 마주쳤다. 목욕실 검은 유리 벽에 스치듯 지나가는 나의 모습을 보고 마치 낯선 여자가 갑자기 나타난 듯 놀라 멈칫했다.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라다니, 나 스스로 자존심이 상해 한참을 괴로워했다. 가끔씩 내가 있는 곳이 너무 낯설어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지’하는 혼돈으로 힘들어 했다. 이민 와서 영어학교를 다닐 때 오후에 조금씩 시작한 청소는 재미있었다. 일에 비해서 수입도 괜찮고 무엇보다 호주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가까이 볼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한국에서 하던 일을 경험 삶아 사업을 하기엔 너무 큰 모험이었고 다른 직업을 구하기엔 언어의 장벽이 너무 높았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갔지만 늘 내 자리가 아닌 것 같았고 정체성을 잃고 살았다. 한국에서 최고 명문대를 졸업한 사람도 청소하고, 수학선생 하던 사람도, 잘나가던 수입업체 사장이었던 사람도 청소하고 있으니 나에겐 과분하다며 스스로를 다독거리기도 했지만 큰 위로는 되지 않았다. 이젠 변화에 희망을 걸 수 없는 나이가 되어 내 자리가 아닌 곳에서 박제된 듯 똑같은 생활을 반복하고 있다.
   흔치 않게 살아 생전에 큰 부귀와 영화를 누린 화가였지만 렘브란트는 노후에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 가난하고 외로운 삶을 보냈다. 생애 가장 비참하고 힘든 때에도 그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 거울 앞에 섰고, 자신을 위로하고 아파하며, 캔버스에 진실한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그 행위는 고백성사 같은 성찰의 시간이었고 그 아픈 시간들을 통하여 진정한 자아를 찾아 그려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나도 외면하지 않고 나 자신과 마주 보고 싶다. 부족한 나도 인정하며 겸손해지고, 가장 지치고 힘든 나에게 위로로 안아주며 살고 싶다. 과거에 희망하던 모습이 아니라고 절망하며 지금의 모습을 부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교만인가. 노 화가의 커다란 웃음과 주름진 얼굴 속에서 빛나는 현자의 눈을 가진 그의 자화상은 그 어느 작품보다 더 큰 깨달음을 나에게 주었다. 비록 낡은 앞치마를 입은 늙고 작아진 몸이지만 세상을 많이 알았다는 듯 환하게 웃고 있는 나의 마지막 자화상을 그려본다.



이영덕 님은 시드니 한인작가회 회원. 2017년 《문학시대》 수필부문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