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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수필과비평』[2018년 11월호, 통권205호 I 세상 마주보기] 소소한 행복들 - 최현섭

신아미디어 2019. 1. 4. 08:24

"이제는 늘 익숙했던 나에서 원하는 ‘나’로 사는 법을 터득해 가고 있다."







   소소한 행복들     -    최현섭


   어릴적 대청마루에는 서봉 김사달 선생의 ‘勤勉, 勤儉, 誠實’이라고 쓰인 글이 있었다. 아버지는 생활신조로 절대 안전, 절대겸양, 절대 성실을 누누이 강조하셨다. 한자를 읽지도 못하는 어린 나이에 묵직한 현판의 글씨는 나의 삶 속에 깊이 그림처럼 각인되었다. 그것이 가훈임을 나중에야 알았다.
   인기작가 재키프렌치 콜러는 부자가 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많이 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적은 것을 원하는 것이다. 오늘날 적은 것을 원하면서 삶의 질을 시간에 두고 자신 내면에 축적할 문화적인 것을 채우는 시간부자들이 있다. 이른바 소확행小確幸을 즐기는 사람들 얘기이다.
   국민행복지수가 높은 나라들의 삶의 방식은 우리와 다르다. 덴마크인들은 ‘휘게(Hygge)’ 라이프를 지향한다. 휘게는 좋아하는 사람과 거실에 앉아 장작불이 탁탁 타오르는 소리를 들으며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는 일상적인 분위기를 말한다. 마이크 비킹은 “휘게는 간소한 것, 그리고 느린 것과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새 것보다 오래된 것, 화려한 것보다 단순한 것, 자극적인 것보다 은은한 분위기에서 휘게를 더 가깝게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스웨덴 사람들의 ‘라곰(Lagom)’은 ‘딱 알맞은 양’, ‘적당히’, ‘충분히’를 뜻한다. 그들은 라곰한 크기, 라곰한 양, 라곰한 기분, 라곰한 분위기, 라곰한 맛을 중요시하며 과한 것을 바라지 않는 편안하고 소박한 삶이 행복의 비결이라고 생각한다. ≪라곰, 스웨덴식 행복의 비밀≫의 저자 롤라 오케르스트룀은 “라곰한 삶은 어떤 상황도 받아들일 수 있는 정서적 여유를 갖추는 것”이라고 얘기한다.
   프랑스의 ‘오캄(Au calme)’은 ‘고요한’ ‘한적한’ 분위기다. 오캄 라이프는 심신이 평온한 상태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삶을 여유롭고 편안하게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일이 잘 진행되지 않거나 스트레스가 심할 때 차 한 잔 들고 ‘오캄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일상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는 여유다.
   일상에서의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확행’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에세이 <랑겔한스섬의 오후>에서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는 것,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넣은 속옷이 잔뜩 쌓여 있는 것, 새로 산 정결한 면 냄새가 풍기는 하얀 셔츠를 입을 때의 기분’이 소확행이라고 했다. 소확행은 미래보다 지금이 소중하고, 특별함보다는 평범함을 중시하며, 행복의 강도가 아닌 빈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는 세계적 추세이기도 하다.
   나는 일할 수 있는 건강과 능력에 감사하며 일정액수를 꾸준히 모아서 도움이 필요한곳에 현금이나 물품을 후원하고 있다. 매년 로타리에 1000$를 보내 전 세계에 소아마비 박멸에 조금이나마 기여하기도 한다. 대소변을 못 보는 중증장애인에게 관장약을 보내고, 충북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한센인을 돕고, 중국연변의 조선족들에게 소를 사주고 캄보디아의 아기들에게 구충제와 영양제를 먹여 건강한 삶으로 살도록 돕고 있다. 러시아의 한인 3세들에게 뿌리를 찾아 고향을 알렸고, 열악한 동남아 주민을 위해 의료봉사를 가기도 한다. 열심히 일하면 좋은 일도 많이 할 수 있어 좋았다. 이것이 나의 기쁨이었고 또한 성취감으로 오만한 행복을 누렸다. 이타적인 삶 속에 나를 가두고 살았던 것이다.
   이제 모든 직책을 벗어나 여유로운 마음을 얻게 되니 주변의 소중한 것이 눈에 들어온다. 시간이 많은 부자가 된 것이다. 그래서 시작한 수필 수업이 삶을 풍요롭게 관조할 수 있고, 문우들과 야외수업을 가서 느끼는 문학적인 관찰에 삶의 깊이가 더해진다. 출근길 아침햇살에 비친 들꽃이 보이고 퇴근길에 수줍어하는 노을을 만난다. 저녁 식사 후 오붓하게 남편과 함께 걷는 동네 한 바퀴는 하루를 마무리하는 의식이다. 창틀에 붙은 먼지를 물걸레로 닦아내는 즐거움, 손 전화에 쌓아둔 문자와 사진을 지우는 것, 메모해둔 구매목록을 몽땅 지워내는 것, 이불을 빨아 맑은 햇살로 뽀송뽀송 말렸을 때 느낌, 집안 구석구석에 쌓아놓은 재활용품을 치우는 것도 좋다. 어머니를 모시고 딸과 함께 3대가 동네목욕탕을 가면 그곳이 환해진다. 입욕을 하며 심신을 깨끗이 씻어내는 것 또한 즐거움이다. 내게로 온 선물 같은 여유있는 삶의 시간이 정말 행복을 느끼게 한다. 이제야 미니멀라이프의 방향성을 찾는 것이 내 안에 있음을 깨닫게 한다.
   이제는 늘 익숙했던 나에서 원하는 ‘나’로 사는 법을 터득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