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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수필과비평』[2018년 12월호, 통권206호 I 지상에서 길찾기] 깨알 메모장을 펼치다 - 김미경

신아미디어 2019. 1. 6. 15:47

"깨알 메모장에 내일은 무엇을 기록하게 될지…."







   깨알 메모장을 펼치다     -    김미경


   정리를 하다 잠시 일손을 멈췄다. 상담일을 하면서 특별한 사연이 있을 때 적어 둔 메모장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사를 하면서 ‘꼭꼭 잘 챙겨둔' 탓에 한 달 남짓 만에 다시 손에 들어온 것이다. 깨알 같은 글씨로 적어둔 메모를 다시 읽다 보니 그 순간 느꼈던 감정들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고용노동부 고객상담센터 전화상담원으로 6년째 근무 중이다. 국가 기관에서의 상담업무지만 감정노동자로서 어려움은 민간 기업 상담 노동자들과 다름없다. 마치 화풀이하듯 쏘아붙이기만 하는 민원인들, 자신들의 이기심에 갇혀 이해관계에 있는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하지 않는 민원인들 때문에 말 못할 고충이 많다.
   하루 근무시간 동안 받아야 하는 콜 수가 정해져 있고, 상담 내용을 모니터 하는 팀장들의 관여도 적잖은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다행히 작년 이맘때 고용노동부에서 ‘감정노동종사자에 대한 보호지침’이 나왔고, 지난달엔 ‘고객응대종사자에 대한 보호’ 법령이 만들어졌다. 감정노동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사회적 목소리가 확대되고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지침이나 법령과는 상관없이 불쑥불쑥 나오는 민원인들의 사연은 여전하다.


   1. 눈앞에 답이 있잖아요
   “몰릉께 그려요….”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살가운 목소리에 상담 일지를 앞으로 당기며 볼펜을 잡는다. 작은 식당 주인인데 최근에 주방 조리사가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 갑자기 식당을 그만둘까봐 걱정이라고 했다. 종업원이 사직의사를 밝혔을 때 조치 등을 알려줄 요량으로 그 근로자가 그만둔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지 물었다.
   그러나 민원인은 “아이, 몰릉께 그려요… .”라며, 다짜고짜 직원이 언제 그만둘 건지 알려 달라 한다. 근로자가 사직의사를 밝힐 때 노동법 상의 절차가 따로 있지 않고, 근로자가 자발적으로 그만 둘 의사가 있다면 이렇게 저렇게 대응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하지만, 설명은 일방적으로 끊겼다.
   “하, 참. 몰릉께 그려요. 딴 건 됐고, 그 직원이 언제 그만둘지 갈쳐 달라니까요.”
   “으음….” 신음소리가 절로 나왔다.
   “선생님, 저는 모릅니다. 그 직원이 혹시 지금 일하고 계신가요?”
   “주방에 있지요.”
   “그럼, 선생님. 잠시 그 직원을 불러 지금 걱정하시는 사항을 물어보세요. 그만두고 말고는 그 직원이 정하는 거니까요.”
   “…….”
   이렇게 사업주와 근로자가 바로 묻고 답하면 될 사항들을 먼 길을 돌아서 애먼 상담원에게 전화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확실한 답을 내놓을 상대를 눈앞에 두고도 ‘우리 사장님이 밀린 임금을 줄지 안 줄지’를 묻는다면 상담원들이 어떤 답을 해야 할까.


   2. 손 안 대고 코 푸는 법
   “방법이 없나요?”
   “회사를 댕기면서 어떻게 신고를…. 거참 모르시네.”
   “신고해서 불이익이 있으면 어떡해요?”
   월급날이 지나도록 몇 개월, 심지어는 1년이 넘도록 임금체불이 발생한 상담을 하는 경우 민원인에게서 종종 듣는 얘기다. 임금체불로 해당 노동관서에 신고하라, 3년 이내 임금채권시효가 남은 상태라면 가능하다 일러준다.
   그런데 정작 민원인들은 불이익을 걱정한다.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화가난다. 근로자로 일한 대가를 제때 받지 못하는 상황인데 이보다 더한 불이익은 뭐란 말인지.
   내 손 안 대고 속 시원히 코 푸는 방법은 한마디로 없다. 신고 절차를 잘 안내받은 후 노동청을 직접 찾아가면 될 일이다.


   3. 누구를 위한 법인가요
   “주휴수당을 못 받고 있는데 어떡하지요?”
   답은 간단하다. 근로기준법 55조 사항으로 근로자가 주휴수당 요건이 되면 사업주는 당연히 지급해야 한다. 주휴수당을 주지 않는다면 노동청으로 신고해 받으면 된다고 안내한다. 그런데 “무슨 법이 그래요?” 알바생 목소리가 뾰족해진다. 기관을 방문하라는 말에 짜증이 난 모양이다.
   “주휴수당이 뭐예요? 그건 왜 줘야 하나요?”
   사업주의 불퉁한 목소리다. 근로자 1주 동안 일하기로 정한 시간이 15시간 이상이고, 출근하기로 한 날 모두 출근하고, 다음 주에도 근로하기로 예정돼 있는 경우 발생한다고 답한다. 그랬더니 사업주는 “곧 문 닫게 생겼는데 무슨 개떡 같은 법이냐.” 화를 내며 따진다.
   “……아시죠, 선생님 그 법을 제가 만든 건 아닙니다.”
   개인 상황에 따라 노동자든 사업주든 글자로서만 위엄을 부리는 법령 한 줄이 얼마나 답답하랴. 더러 듣게 되는 말 중 하나가 사업주를 위한 법이네, 근로자만을 위한 법이네 하는 타령이다. 두 목소리의 타령조를 다 듣게 되는 중간자 입장에서 이렇게 또박또박 대답한다.
   “근로자는 사업주를 위한 법, 사업주는 근로자만을 위한 법이라고 하십니다만, 근로기준법은 근로조건의 최저 기준을 정함으로써 노사 모두를 위한 법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4. 살다 보면
   “어린이집인데요, 교사가 3주 정도 아파서 입원해야 되는데 해고 관련해서 상담하려고요.”
   수술을 하고 1주가 지났고, 앞으로 2주 정도 더 입원을 해야 하는 교사를 어린이집 사정만으로 해고를 하겠다며 방법을 물은 것이다. 무심한 듯 법적인 절차는 이러하다 알려주었다. 사실 이런 상담을 할 때면 내 목소리도 법령 종잇장만큼이나 가볍고 버석거린다. 상담을 마치려는데 그 외에 더 알려줄 게 없냐는 말에 나도 모르게 “조금 편한 마음으로 상담을 해도 되겠느냐.”며 동의를 구했다. 그런 후 “살다 보면 아플 수도 있는데, 아픈 게 정당한 해고 사유가 되진 않을 거다. 2주 정도 대체교사를 사용하고 아픈 교사를 잘 다독여주면 다른 교사들도 어린이집에 대한 애정이 더 생기지 않겠느냐.”고 달랬다.
   이런 경우 반응은 두 부류다. 일말의 양심을 건드린 경우로 받아들여준다면 고맙다 할 것이고, 자존심을 건드린 걸로 되면 차가운 화살이 되어 돌아온다.
   다행히 어린이집 원장은 자기가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을 깨닫게 해줘 고맙다고 한 후 전화를 끊었다. 살다 보면 이날처럼 고맙게도 ‘고맙다’는 인사를 듣는 날도 있다.
   뉴스 자막으로 노동 관련 내용이 스윽 지나간다. 새 소식으로 내일 아침 상담센터 전화기는 받아라, 받아라, 받아라, 울어댈 것이다. 복잡한 절차가 끝난 개정 법률이, 두꺼운 보고서로 마무리된 정책이, 경제 관료의 한마디가 최전방에서 대표전화를 받고 있는 전화상담원들의 하루하루를 바쁘게 할 것이다.
   깨알 메모장에 내일은 무엇을 기록하게 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