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밭 귀퉁이에 묻어두고 바람도 없는 어느 날, 빨간 뺨처럼 붉은 꽃으로 피어나면 우리의 화원은 또 얼마나 아름다울까? 나는 자꾸만 눈물겹다. 귀한 줄 모르고 다 흘러간 세월들이, 귀밑머리 하얗게 된 지금, 한없이 그립다. 애달프다."
비밀의 화원 - 김미화
빨끔 J의 집을 떠올린다. 가장자리를 따라 벌건 녹이 점점이 번져 가던 양철대문과 지붕처럼 그 집을 감싸고 있던 침묵을 생각한다. 이제 그 기억도 짙은 안개 속에서 바라보는 풍경처럼 조금씩 희미해져간다.
J는 내가 중학생이 되어 처음으로 사귄 친구이다. 유달리 소심한 성격 탓에 며칠이 지나도록 어색하고 서먹한 등하교 시간이 연이어졌다. 통학버스 안의 낯선 얼굴들 틈에서 맨 처음 내게 말을 걸어준 아이, 그 아이가 바로 J였다. 반은 달랐지만 그날 이후로 우리는 둘도 없는 단짝이 되었다.
어수룩하고 내성적이라 친구 사귀는 일이 제일 어려웠던 내게 J는 우상이었다. J는 누구에게나 친절한 밝고 쾌활한 아이였다. 한 번만 말을 섞어보면 금방 신뢰하게 되는 든든한 언니 같았다. 학생기록부의 칸칸마다 분명 리더십이 강하고 명랑하며 씩씩함, 혹은 매사에 적극적으로 활동함이라고 적혀 있었을 것이다. 모든 아이들이 다 좋아했던 J가 내게 말을 걸어 준 것만으로 너무 기뻐서 나는 어쩔 줄 몰랐다.
J의 집은 신천교를 건너 10분 가량 걸어오면 계단 위 산비탈에 있었다. 달팽이집처럼 둥글게 돌아간 석축을 따라 걷다가 숨이 턱에 찰 때쯤이면 저만치 그 애의 집이 보였다. 통학버스를 타고 우리 집 근처에서 내린 J와 손을 잡고 J네 집까지 함께 걷곤 했다. J의 엄마는 포장마차를 꾸려가고 있었다. 두 살 아래 남동생을 돌보는 일은 늘 J의 몫이었다. 동갑내기인데도 J는 나보다 더 일찌감치 철이 들어 있었다.
개나리가 피었다 지고 초록빛 잎들이 삐죽 머리를 내밀었다. 그러나 바람은 여전히 한겨울이었다. 강바람에 빨개진 뺨을 한 채, 우리는 동백꽃이 그려진 두툼한 솜이불 아래 다리를 넣고 앉아 오래된 낡은 사진첩을 보기도 했다. 아주 멋진 양복을 입은 남자를 가리키며 “우리 아버지야.”라고 말하던 J의 낮은 목소리가 생각난다. 올백으로 빗어 넘긴 사진 속 머리칼에 반사된 빛을 괜스레 손가락으로 쓰다듬어 봤다. 엄청난 재력가처럼 보이는 아버지를 둔 J가 많이 부러웠다. 우리 아버지가 쓰던 재떨이, 어른 남자의 구두, 외투 같은 것이 전혀 보이지 않았는데도 나는 그것을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J의 얼굴 윤곽선과 똑 닮은 남자의 사진 한 장만으로도 이미 화목한 가정의 표본처럼 보였다. 사진 속 남자의 당당한 표정 때문에 그랬는지 구김살 없이 늘 밝은 J의 웃음소리 때문이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J의 집은 녹슨 양철 대문을 조심스레 밀고 들어가야 했다. 집은 언제나 마루께부터 짙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그 집은 우리에게 소중한 ‘비밀의 화원’이었다. 사춘기를 겪기 직전의, 어린이도 어른도 아닌 어중간한 시절이었다. J의 집은 우리의 상상 속에서 베르사이유 궁전도 되었고 조선시대 왕비의 처소가 되어 주기도 했다. 때로는 커다란 자물쇠를 풀고 누가 볼까 조심스레 들어와야 하는 둘만의 비밀 정원이 되어 주었다. 사시사철 이름 모를 꽃들이 만발하고 새소리와 눈부신 햇살은 그 안에 언제나 가득 차 있었다. 서로 눈만 마주쳐도 터진 홍시마냥 웃음부터 툭 비어져 나오던 즐거운 날들이었다. ‘친구’라는 단어를 영혼에 새겨준 J, 우정이란 경계를 넘어 또 하나의 나라고까지 생각했던 그때, 그 나날들. 돌아보면 온통 마음 저리는 일투성이인데도 전혀 몰랐다. 빛나는 때는 금방 지나간다는 것을. 너무 많이 사랑하면 깊은 상처를 입는다는 것을 말이다.
나만의 친구로 남아주길 바랐던 내 욕심이 화근이었다. 내게 J는 단 한 명뿐인 친구였는데 J에게 나는 그저 많은 친구들 중의 한 명이었다. 열네 살의 나는 처음으로 진지하게 죽음을 생각했다. 사람 사귀는 일에 서툴렀던 대가였다. 엄마가 말했다. 친구 사이는 간이라도 빼줄듯이 그렇게 사귀는 게 아니라고. 상대를 볼 때마다 ‘너 때문에 죽고 싶어.’라고 늘 되새김질 하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그때는 너무 어렸다. 결국 ‘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너’라고 두고두고 후회할 말을 던지고 우리는 남보다 더 멀어졌다. 그때 여린 마음에 그어졌던 생채기는 딱지가 앉았다가 늘 다시 덧나곤 한다. 지금도 친구라는 단어에 온전하게 진심을 담지 못한다. 나에게 친구는 오직 J뿐이란 것을 멀어지고 나서야 너무 늦게 깨달았다.
단발머리 중학생에서 지금, 얼마나 멀리 와 있는지 뒤돌아보면 그만 마음이 사막처럼 푸석푸석 마른다. J와 가꾸던 그 화원 속으로 다시 들어갈 수 있다면 나는 아직도 소녀처럼 설레며 J를 기다릴 수 있다. 지난날은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옛 시간들을 끌어안은 채 마른 씨앗이 되었다. 마음 밭 귀퉁이에 묻어두고 바람도 없는 어느 날, 빨간 뺨처럼 붉은 꽃으로 피어나면 우리의 화원은 또 얼마나 아름다울까? 나는 자꾸만 눈물겹다. 귀한 줄 모르고 다 흘러간 세월들이, 귀밑머리 하얗게 된 지금, 한없이 그립다. 애달프다.
'월간 수필과 비평 > 수필과비평 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월간『수필과비평』[2018년 10월호, 통권204호 I 세상마주보기] 세 사람 - 박범수 (0) | 2018.12.05 |
---|---|
월간『수필과비평』[2018년 10월호, 통권204호 I 세상마주보기] 단풍기丹楓記 - 김삼복 (0) | 2018.12.04 |
월간『수필과비평』[2018년 10월호, 통권204호 I 사색의 창] 씨앗의 신비로움 - 함응식 (0) | 2018.12.04 |
월간『수필과비평』[2018년 10월호, 통권204호 I 사색의 창] 찔레꽃 - 진부자 (0) | 2018.12.03 |
월간『수필과비평』[2018년 10월호, 통권204호 I 사색의 창] 무조건 항복 - 임석재 (0) | 2018.1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