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생명체는 어떤 것이라도 타인의 손에 의하여 생명이 훼손되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존재이다. 베란다에 자라나는 감 씨앗의 발아와 성장과정을 지켜보며 씨앗의 힘은 생각할수록 신비로운 것 같다."
씨앗의 신비로움 - 함응식
빨갛게 익은 대봉감을 한입 물었다. 달짝지근한 맛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내가 먹고 있는 살점은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자랄 때 먹어야 할 영양분이다. 씨앗의 소중한 영양분을 빼앗아 먹는다. 달콤함에 빠져 있을 때 숨어 있던 씨앗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본다. 순간 미안한 마음이 든다. 씨앗을 버릴까 하다, 휴지에 올려놓았다. 햇볕이 잘 드는 베란다에서 말렸다. 순간 호기심이 생긴다. 봄에 한번 심어볼까. 씨앗을 봉투에 담아 책장에 보관했다.
스티로폼 박스를 구하여 흙을 가득 채웠다. 씨앗 다섯 개를 심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갈색 껍질을 이고 여린 싹이 올라온다. 참 신기하다. 그냥 버렸으면 어둠 속에서 생을 마감하고 죽었을 것이다. 그래도 좁다란 스티로폼 박스에 싹을 틔운 생명력이 경이롭다.
씨앗은 환경을 탓하지 않는다. 조건만 맞으면 언제나 생명의 싹을 틔운다. 사회의 규범을 따르지도 않는다. 처지를 비관하지도 않는다. 그냥 다리 뻗을 틈만 있으면 뿌리를 내리고 살아간다. 가파른 절벽 끝이라도 발 디딜 한 줌 흙이 있으면 뿌리를 내린다. 척박한 환경과 싸우다 쓰러져 죽을지라도 싹을 틔운다. 목이 타는 갈증에 온몸이 말라 비틀어질 때까지 버티어 본다. 태고부터 숨겨놓은 불같은 생명의 에너지가 놀랍다.
나무는 커다란 잎을 가느다란 몸뚱이에 매달고 의젓한 모습이다. 씨앗의 모습은 사라지고 나무로 변했다. 한껏 왕성하던 청춘의 열정도 가을이 되자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나뭇잎을 모두 떨어뜨린 여린 나무는 나무젓가락처럼 가냘프다. 겨울을 지나는 동안 잊고 있었다. 봄에 나무를 살펴보니 겨울에 죽은 것처럼 바싹 마른 모습이다. 그냥 뽑아 버릴까 생각했다. 그러나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흙이 촉촉하도록 물을 주었다. 죽었던 것처럼 보이던 앙상한 나무에서 연녹색 잎들이 나무껍질을 뚫고 나온다.
생명은 겨울 동안 마른 나무줄기 속에 웅크리고 숨어 있었다. 나는 생명을 보지 못했다. 연약한 잎들로 변신하여 눈앞에 나타났을 때 보았다. 나는 얼마나 우둔한 사람인가. 눈에 보이는 것만 인정하고, 존재하고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은 알아채지 못했다. 나무는 어른 키만큼 자랐다.
세 그루의 나무가 살기에 장소가 좁아 보였다. 나무를 분리하여 심으려고 박스를 들어보았다. 박스가 잘 움직이지 않는다. 힘껏 밀어보니 박스 밑바닥을 뚫고 뿌리가 베란다 바닥에 달라붙어있다. 뿌리는 더 깊은 흙을 찾아 박스의 틈새를 비집고 나와 뱀처럼 똬리 틀고 있다.
모종삽으로 박스 안의 흙을 이리저리 뒤적여 보니 잔뿌리들이 한 몸처럼 엉켜있다. 마치 헤어지지 않으려는 가족처럼 꼭 붙어있다. 한 과일에서 나온 씨앗으로 자란 나무이니 형제자매이다. 이산가족 상봉 방송을 보면 오래 떨어져 있던 가족은 첫 만남에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부둥켜안는다. 마치 떨어지면 안 되는 것처럼 말이다. 가족은 헤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사람이나 나무나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무뿌리를 분리하려는데 얼마나 단단하게 달라붙었는지 박스를 부수고 분리하였다.
좁은 베란다에 쌀 포대를 펼쳐 놓고 작업을 하였다. 박스를 부수다 보니 온 사방으로 흙이 튀어 엉망이 되었다. 제일 큰 나무는 화분에 심고, 두 그루는 조그마한 스티로폼 박스에 심었다.
나무를 보며 생명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많은 씨앗이 발아되어 싹을 틔운다는 것이 쉬운 것 같지 않다. 모든 씨앗이 바라는 가장 큰 꿈은 싹을 틔우고, 세상에 늠름한 모습으로 나타내 보기를 원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씨앗은 싹을 틔워보지 못하고 동물들의 먹이가 된다. 모든 생명체들이 경이로운 것은 죽을지도 모르는 절박한 순간을 이기고 살아남은 승자들의 모습이라서 그런 걸까. 그보다는 씨앗으로서의 사명을 다해서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명을 다한다는 것은 그가 속한 사회를 위하여 가장 중요한 일인 것 같다.
아파트 화단에 누군가 키우다 버린 에피프렘넘 화초를 발견했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생명체는 목이 말라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았다. 안타까운 마음에 화초를 가져다 화분에 심었다. 삼 년 동안 키워 보았지만 크게 자라지 않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줄기가 허공을 향하고 있다. 무엇인가 붙잡으려 허공을 향하여 손을 내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줄기가 올라갈 수 있도록 벽에 못을 박고, 넝쿨 머리를 못 위에 걸쳐 놓았다.
수년간 잘 자라지 않고 움츠려 있던 에피프렘넘이 줄기가 뻗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자 빠르게 자랐다. 일 년도 안 되어 줄기가 벽면을 휘감을 정도로 자랐다. 아무렇게 버려져 있던 화초도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주자 힘차게 살아가고 있다.
세상에는 누군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생명체가 있다. 필요한 순간에 손길을 외면하면 생명체는 살지 못하고 죽는다. 사람뿐만 아니라 동식물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서로에게 마음의 문을 닫고 있다면, 도와 달라 외쳐도 들을 수 없다. 서로에게 마음의 문을 열고 상대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들어 준다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있을 것 같다.
살아 있는 생명체는 어떤 것이라도 타인의 손에 의하여 생명이 훼손되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존재이다. 베란다에 자라나는 감 씨앗의 발아와 성장과정을 지켜보며 씨앗의 힘은 생각할수록 신비로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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