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들에 대한 구휼을 끝까지 감당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나를 마냥 기다릴 저들에게 뭐라 실망할 메시지를 전할까 가슴만 답답하다. 몇 개월 새들의 핍월 동안 젖어미 노릇을 보시할 새 엄마가 나타난다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는데 말이다."
새 엄마를 구합니다 / 박종형
숲이 없는 산이란 상상할 수 없다. 숲이 아름다운 것은 나무가 있기 때문이며 숲에 활력이 넘치는 것은 거기에 생물들이 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산에 들면 신분은 사라지고 존재감만이 뚜렷해진다. 그리고 스마트폰을 벙어리로 만든 채 함묵 모드로 걸어가면 사색의 길이 열리면서 숲이 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지나가던 바람조차도 숲에 잡히면 소리를 낸다.
그 소리 중에 신비한 정밀靜謐을 뚫고 날갯짓소리가 들린다. 새들의 반색이 묻어온다. 나를 기다리던 거다. 우리의 교감이 시작되면 소리에 대한 감응이 그리도 달콤하고 즐거울 수가 없다.
새들과 만나는 자리 가까이에 앉아 배낭을 열고 모이통을 꺼낸다. 저절로 시선이 나를 에워싼 나무들을 훑어본다. 가슴이 약간 뛴다. 숲에서 새들을 기다린다는 게 늘 드는 설렘이라는 사실이 즐겁다. 얼마 지나지 않아 땅바닥 빛 그림자가 흔들려 빛 무늬가 헝클어진다. 나는 안다, 그 그림자를 던진 주인공이 동고비 척후병임을.
나는 서둘러 척후병과 눈을 맞춰 알은체를 한다. 그때 나의 입술엔 벌써 반가워 흘리는 미소가 걸리고 마음먹지도 않은 반색이 나간다. 어서 가 네 식구들을 데려 오려무나 하고.
내가 모이통에다 주르르 좁쌀을 쏟아 붓고 물러나기 바쁘게 나무줄기에 어슷하게 매달려 나를 지켜보며 마치 재촉하는 듯 나무줄기를 두 발로 오르락내리락 하며 가끔 뭔가를 쫑알대며 기다리던 놈이 쪼르르 모이통으로 내려앉아 급하게 두서너 입 모이를 먹고는 서둘러 날아올라 사라진다.
나는 알고 있다. 수 분 후면 척후병 동고비를 따라 한 무리의 동고비들이 날아올 것이며 그 편에 곤줄박이며 어치가 묻어오리라는 것을. 그런 예측은 열에 아홉으로 적중한다. 나는 비로소 편한 마음으로 차를 마신다. 그리고 한 무리의 동고비들이 날아와 사이좋게 먹는다. 덩치가 큰 어치도 함부로 부리를 휘두르지 않는다.
보기 좋은 공존의 장이며 숲은 순수한 평화로 가득 찬다. 굶주린 새들이 핍월의 식탁에서 먹이를 다투지 않는다는 사실에 나는 성가시다면 성가신 겨울나기 새 모이 주기를 멈추지 못하는 것이다. 가파른 오름 길이나 언 미끄러운 길에서 넘어지는 일을 치르면서도 저 측은지심의 행보를 계속함은 이해할 수 있을라나 모르지만 동고비 척후병의 기다림 때문이며, 어느 동고비인가 배를 채우고 난동고비가 내 가까이 날아와 나무줄기에 어슷하게 앉아 나를 힐끔거리며 수고했다는 건지 고맙다는 건지 뭔가를 쫑알거리는 모습에 그만 매료된 때문이다.
그런 내가 탈이 나 산행을 중지하게 되고 새들의 핍월이 시작되었는데도 모이를 줄 수 없게 되었다.
-1-
굶주리는 새들을 하느님께서 먹이실 것을 믿지만 모이통 근처를 서성이며 나의 출현을 고대할 새들을 생각하면 속이 탄다. 한 겨울에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먹을 걸 고대하다가 헛걸음으로 돌아서는 가긍한 꼴을 상상하는 것은 아무리 그 대상이 새라고 할지라도 괴로운 일이다. 어쩌다 끝까지 감당도 못할 적선을 시작했던가 후회가 되기도 했다. 해서 궁리 끝에 궁여지책으로 새 엄마를 구하려 나선 것이다.
산행 이웃들이 나를 ‘새 할아버지’라고 부른다. 내가 장장 스무 해 동안을 다닌 영장산에는 낯익은 등산객이 적지 않다. 그들이 내게 붙인 별명이다. 내가 새들이 굶주리기 시작하는 핍월乏月인 11월 하순부터 4월까지 새들에게 모이를 주는 것을 지켜본 이들이 내게 붙인 애칭이다. 처음엔 다소 뜨악해 보았다가, 모이 주기가 몇 년간이나 지속되자 그 항심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 세월이 어언 십 년으로 계속돼 새들마저 새 할아버지의 출현을 기다리게되자 지켜보는 이들이 그만 그 새들의 반응과 교감에 감동해 이심전심으로 친 박수에 저절로 달려 나온 호칭이 ‘새 할아버지’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영장산 역사에 그런 호칭을 부여받은 산사람은 내가 처음일 것이라 나는 그 애칭이 소중하다.
나는 연하고질煙霞痼疾을 앓을 정도로 산을 좋아한다. 등산을 한 지가 반세기 가까이나 되었으므로 산에 관한 것이라면 그 철철이 변하는 색깔, 소리, 냄새, 모습, 느낌 등 숲의 변모를 속속들이 안다. 뿐만 아니라 사계를 따라 다른 햇빛, 바람, 눈비가 어떻게 변하는지 그리고 거기 사는 생물들이 그 변화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목격했다. 특히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대상이 있는데 나무들과 새들 등 생물이다. 그것들의 삶을 보며 생명의 외경스러움과 생존의 역사役事를 실감한다. 핍월에 이르러 그들과의 교감은 저 소란스러운 산 아래에서는 맛볼 수 없는 아리고도 즐거운 것이다. 그런데 저들에 대한 구휼을 끝까지 감당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나를 마냥 기다릴 저들에게 뭐라 실망할 메시지를 전할까 가슴만 답답하다. 몇 개월 새들의 핍월 동안 젖어미 노릇을 보시할 새 엄마가 나타난다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는데 말이다.
박종형 님은 수필가. 《좋은수필》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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