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어서 피땀 흘려 번 돈이지만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술 한 잔이나 밥 한 끼를 사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또 스마트폰을 놀리지 말고 짬 날 때마다 친구나 친척, 후배들에게 카카오 톡으로 안부 메시지를 보내며 살아가면 좋으려니 싶다. 산다는 게 별것이던가?"
내 나이를 생각하면 / 三溪 金 鶴
나는 신문이나 텔레비전 뉴스 시간에 내 나이를 확인하곤 한다. 평소에는 별로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산다. 그러나 신문이나 텔레비전 뉴스 시간에 등장하는 인물의 나이를 보면 나보다 많은 이들이 흔치 않다, 그럴 때마다 내 나이가 이렇게 많나 싶어, 놀라곤 한다.
내 나이 두 살 때 8·15 광복절을 맞았다. 그러나 내 기억 속에는 일제강점기의 아름답지 않은 일들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그러니 어디서든 일본 사람들을 만나더라도 주눅들지 않고 당당하다.
내 나이 다섯 살 때 큰할아버지 회갑잔치에 따라갔던 나는 나를 귀여워하시던 할아버지가 주신 술을 마시고 비틀거리며 걷다가 부엌 앞 구정물통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기억에는 없지만 할머니가 들려주셔서 알고 있다.
내 나이 여덟 살 때 6·25 한국전쟁이 터졌다. 그 해 뜨거운 여름밤이면 나 같은 조무래기들을 뒷동산에 모아서 북한노래를 기르쳤다. 내 재종형은 그때 밤에 노래 배우러 가다가 독사에 물렸고, 시골에서 의사의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단방약으로 치료하다가 왼쪽 발목을 절단하는 바람에 평생 장애자로 살아가고 있다. 또 이 한국전쟁으로 인해 고향의 초등학교 교장과 면장을 지내신 할아버지가 퇴각하기 전날 밤 공산군에게 끌려가서 면내 유지 30여 명과 함께 목숨을 잃으셨다. 그래서 추석날 저녁에는 할아버지 제사를 모시게 되었다.
세월은 훌쩍훌쩍 지나갔다. 중·고·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다녀와서 직장에 들어갔다. 전주 H고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매달 월급을 받으니 어머니는 금세 부자가 될 것 같다며 좋아하셨다. 참으로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6개월 만에 방송국으로 직장을 옮기고 말았다. 그 뒤 10여 년이 지나자 군사정부가 언론통폐합을 하는 바람에 내가 다니던 S방송국이 KBS로 통합되었고, 내 나이 58세 때 12월에 정년퇴직을 하게 되었다. 방송국에 다니던 시절 IMF와 구조조정 등 고비가 있었지만 그 위기를 무사히 넘기고 정년퇴직을 했으니 운이 좋았던 셈이다.
나는 회갑과 고희를 맞아도 축하잔치를 할 수 없었다. 장수시대에 접어드니 그런 행사를 하는 이들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내 나이 70세가 되자 잔치는 하지 않고 아들딸 2남 1녀가 여행비를 마련해주어서 아내와 함께 캐나다를 다녀왔고, 아내의 고희기념으로는 동유럽을 다녀왔다.
앞으로도 나이가 마련해 줄 행사가 이어질 테니, 자녀들은 귀찮을지도 모르겠다. 77세가 되면 희수喜壽, 80세가 되면 산수傘壽, 88세가 되면 미수米壽, 90세가 되면 졸수卒壽, 99세가 되면 백수白壽다. 고령화시대가 되고 보니 이런 꿈을 꾸게 되는 것 같다. 장수가 좋기는 좋은 것 같다.
오래 사는 게 좋긴 좋지만, 내 발로 가지 못하고[我足不行], 내 손으로 먹지 못하며[我手不食], 내 입으로 말을 못하고[我口不言], 내 귀로 듣지 못하며[我耳不聽], 내 눈으로 보지 못하면[我目不視],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환갑이 지나면 한숨도 아껴 쉬어야 한다는 옛말이 결코 허튼 소리는 아닌 듯하다.
백세시대를 맞았으니 첫째도 둘째도 건강이요, 건강관리에 더 힘을 쏟아야 할 것 같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한다 해도 다시 젊은시절로 돌아갈 수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조물주에게 특별 청탁을 하여 인생을 두 번 살게 할 수도 없는 일이다. 멋지게 인생을 마무리하도록 해야 할 것 같다.
젊어서 피땀 흘려 번 돈이지만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술 한 잔이나 밥 한 끼를 사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또 스마트폰을 놀리지 말고 짬 날 때마다 친구나 친척, 후배들에게 카카오 톡으로 안부 메시지를 보내며 살아가면 좋으려니 싶다. 산다는 게 별것이던가?
김학 님은 수필가. 《월간문학》으로 등단. 저서 : 『하여가&단심가』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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