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마수트라의 한 설법이 이순 고개를 훌쩍 넘은 내 귀를 파고든다. ‘성性은 성聖스러운 것, 추하거나 외설적이지 않다. 성은 즐겁고 건강하고 생산적인 것, 내리는 비나 눈처럼 자연스러운 인간의 욕망이다.’ 청춘의 불길이 스러지고 몸이 식은 후에야 깨닫는다."
카마수트라kamasutra / 김재환
연못은 몽환적으로 앙증맞고 신비롭다. 달月과 찬드라 왕비의 기이한 전설이 깃든 월지月池, 수면 위로 파란 물안개가 가늘게 피어오른다. 연분홍 수련 사이로 오리 가족이 유유자적 아침을 연다. 호수 위에 서부사원 첨탑들의 잔영이 어른어른 반짝인다. 건기乾期가 시작되어 햇살 고운 사원군寺院群의 정문을 들어선다. 창공엔 독수리 몇 마리 이방인을 감시라도 하는 듯 날갯짓하며 맴돈다. 푸른 잔디밭에선 원숭이가 기웃거리며 일행을 반긴다. 사원은 정결했다. 잘 가꾸어놓은 어느 왕궁의 정원보다 훨씬 더 깔끔하고 운치있다. 드넓은 구릉, 초원 위에 듬성듬성 사원들이 자유롭게 서 있다. 사원은 여러 채가 아닌 한 동의 석조 건축물이다. 날렵한 모양새다. 사원과 사원 사이로 꾸불꾸불 잘 닦인 보도가 평안하고 아늑하다. 사원의 첨탑은 떠오르는 아침햇살을 받아 흰색도 붉은색도 아닌 연갈색의 묘한 빛깔을 시시각각 변화무쌍 발산한다. 사원 첨탑들의 황금빛에 눈부시다.
카주라호는 옛 10~11C 번성했던 찬드라 왕조의 수도였다. 델리에서 천리 길에 있는 조그만 마을이다. 오늘날 미투나 사원의 유명세를 타고 관광지로서 도약하는 모습이 생기 넘치고 발랄하다. 당시엔 서른여 개 남짓 사원이 있었다 하나 지금은 스무 개 남짓 남아있다. 이슬람 지배와 오랜 세월 방치하여 많이 훼손 멸실되었다 한다. 평원 위에 사원군은 동부와 서부로 나뉘어져 있다. 동부 사원은 압살라 조각이 아름다운 자이나교 사원이며 규모 면에선 서부사원에 미치지 못한다. 서부 사원은 힌두교 사원으로 웅장하고 수려하여 예술성이 빼어나다. 처마 끝을 여러 층으로 쌓아올린 뾰쪽한 첨탑이다. 층과 층 사이 원형으로 된 벽에 새겨진 조각상들이 기기묘묘 오묘하다. 전체적인 모양은 바닐라 아이스크림, 껍질 벗긴 통통한 옥수수를 세워놓은 모양새다.
정문에 들어서면 산뜻한 녹색 정원과 꽃동산이 펼쳐진다. 시바 신을 모시는 마팅게스와라 사원이 있고 그 옆에 춤추는 여신 압살라를 대표하는 락쉬미나 사원이 맞이한다. 비슈누 신(멧돼지)을 섬기는 바라하 사원도 옆에서 기다린다. 붉은 사암 원형의 벽면은 중세 인도의 부조浮彫를 대표하는 많은 반 양각의 조각상像들이 빼곡하다. 병사, 여인, 동물 등이 요염한 자태로 관능의 극치를 이룬다. 미투나 상은 노골적으로 에로틱하다. 남녀의 교합 장면, 인간과 짐승의 혼음, 그룹 섹스 장면이 우스꽝스러우면서도 한편 성스럽고 리얼하다. 외설적인 적나라한 교합의 체위를 섬세하게 표현, 진지하기도 하다. 유난히 여인의 젖가슴과 둔부, 남성의 성기가 크고 볼륨 넘친다. 과장이 있겠으나 찬드라족과 아리안족의 신체 각 부위는 분명 동양인에 비해 크고 우람하다. 보수적 성 관념을 가진 동북아시아 사람들은 킥킥거린다. 어린이들은 한쪽으로 물러선다. 비교적 성 개념이 개방적인 인도인과 서양인들은 감상에 진지하다. 앙코르와트 조각상보다 음양각陰陽刻이 뚜렷해 훨씬 더 입체적이다. 현실감과 예술성은 배가된다. 천 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한다. 찬드라 왕국은 성적으로 매우 개방된 자유분방한 나라였나 보다.
왜 신성한 사원에 에로틱한 성적 남녀 교합상을 수없이 조각해 놓았을까? 현지인 해설자의 설명이 뭔가 한 움큼 부족하다. 명쾌한 해답을 찾지 못해 갈증을 느낀다. 흥미로우나 시원한 대답이 없어 답답하다.
사원은 인간과 신 사이, 윤회의 삶을 사는 인간들을 피안의 세계로 실어 나르는 수레와 같다고 한다. 사원 내 외벽에 새겨진 선녀상과 악사들, 무장한 무사와 짐승들, 터질 것 같은 완숙한 여인의 가슴과 둔부, 에로틱한 남녀의 교합상들, 우아하게 패인 허리선과 생동하는 몸짓, 넋이 빠진 황홀과 무아의 경지에 이른 얼굴 표정, 솔직 담대한 성행위의 표현은 체면을 중시하는 점잖은 유교 교육에 길들여진 나로서는 낯 붉어지고 심장이 뛰는 충격이었다. 그러나 세월의 더께를 쓴 나이가 심장박동을 진정시킨다. 야하거나 천박스럽지 않다. 성스러움을 인식한다. 사원의 벽면에 새겨진 사랑의 장면들도 카마수트라에서 뽑아 조각한 것이다.
절 입구에 사천왕이 가장 무서운 표정으로 사원을 지킨다. 속계와 선계의 파수꾼 사천왕은 공포의 대상이다. 어쩌면 신들의 신성한 장소를 악귀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방편과 수단일 것이다. 우파니샤드에는 사원에 조각된 수컷과 암컷의 에로틱한 교합상들은 신과 인간의 합일의 상징으로 해석하는 표현이 있다한다.
카마는 애욕의 신이며 쾌락의 여신 라티의 남편이다. 금욕을 중시했던 불교시대에 항거라도 하듯, 힌두교는 적나라한 성욕을 승화시켜 다산多産을 하고 국부의 원천, 수단으로 이용했지 않았나 싶다. 칸타라야 마야데브 사원 등 여러 사원 이야기는 끝이 없다. 그리스신화보다 더 흥미진진하다. 이곳에선 삼라만상, 우수마발 모두가 신이다. 가히 신들의 나라, 신들의 천국이다.
카마수트라는 4C경 산스크리트어로 쓴 고대 인도의 성애에 관한 경전이다. 108개 체위의 성교 장면을 뽑아 그림을 넣어 만든 성교범性敎範이다. 서점을 찾아 카마수트라, 카주라호 등 화보와 역사서관련 자료를 몇 권 사 들여다본다. 화보 속엔 인간과 짐승이 연체동물 파충류처럼 꼬이고 감겨있다. 요가의 나라여서 그럴까. 최고의 테크닉과 쾌락의 열반세계로 이끌 것 같다. 아니면 고도의 성 테크닉으로 인해 요가가 발전되었을까.
얼마 전 쓸쓸히 죽어간 이 시대의 불운아 마광수가 떠오른다. 촉망받는 모든 장르의 문학을 섭렵한 작가이며 교수였던 그, 한국문단의 지나친 교훈성과 위선을 비판했던 사람, 외설과 파격이라는 색다른 시도를 하여 고루한 한국문단에 신선한 새바람을 불어 넣었던 학자. ‘즐거운 사라’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등 대표작이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구속되고 면직과 복직을 거치며 신산하고 곤고한 삶을 살아간 문단의 풍운아이며 이단아였다. 그의 직업이었던 문학과 동료가 그를 죽이고, 언론과 여론이 매도했었다.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원초적 외설문학이라고 시대를 한 발 앞서간 그를 수장시켰다. 그들에 의해 지옥과 천국을 수없이 오르락내리락 한 작가, 더불어 사회와 조직과 체제가 그를 무참히 짓이겨 뭉갰다. 외신은 ‘한국의 외로운 에로티카의 장인’이라 부른다. 왜 하필 여기서 마광수가 떠오를까?
카마수트라의 한 설법이 이순 고개를 훌쩍 넘은 내 귀를 파고든다. ‘성性은 성聖스러운 것, 추하거나 외설적이지 않다. 성은 즐겁고 건강하고 생산적인 것, 내리는 비나 눈처럼 자연스러운 인간의 욕망이다.’ 청춘의 불길이 스러지고 몸이 식은 후에야 깨닫는다.
* 카마수트라(Kamasutra) : 현존하는 고대 인도의 성애론 서 중에서 가장 오래된 문헌. 4~5C경 바츠야야나가 저술한 것으로 전해짐. 우파니샤드의 카마를 중심으로 한 내용이다.
* 우파니샤드 : 고대 인도철학경전. 산스크리트어로, 師弟 간에 ‘가까이 앉다’란 뜻. 스승의 발 아래서 가까이 앉아 배우고 전수받는 신비한 지식. 스승은 먼저 아들에게, 다음 제자에게 가르쳤다 함.
김재환 님은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 수필집 : 『금물결 은물결』, 『역마살』 등 공저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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