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수필과 비평/수필과비평 본문

월간『수필과비평』[2018년 09월호, 통권203호 I 세상마주보기] 빈 벽을 바라보며 - 은옥진

신아미디어 2018. 11. 3. 12:28

우두커니 텅 빈 벽을 바라본다. 이젠 그 그림들이 아이들에게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







   빈 벽을 바라보며    -    은옥진


   오래전부터 벼르던 일을 오늘 마쳤다. 집에 있는 그림 액자를 아이들 앞앞으로 챙기는 일이었다. 어서 가져가라고 누누이 일러두건만, 그때마다 엄마가 아끼시는 그림을 어찌 가져가겠냐며 매번 이런저런 핑계를 대곤 했다.
   그림 뒤편에 각자 이름을 적어주면 나중에 가져갈 것이라고들 했다. 오랫동안 병치레에 시달리는 어미 앞에서 선뜻 들고 가기가 마뜩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없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제 나의 건강도 어느 정도 회복되었고 무엇보다도 제한된 공간인 아파트인지라 커다란 액자들을 잘 간수하기가 만만하지 않았다. 하여 마음먹고 열몇 점을 골라 일일이 포장을 끝냈다.
   오랫동안 눈에 익어서 그럴까. 크기만 봐도 누구의 무슨 작품인지 가늠이 되었다. 저마다 몫을 정해 집집으로 실어 보내고 나니 집안이 휑뎅그렁하다. 사십여 년을 함께했으니 어찌 무심하랴. 가슴 한 모서리가 텅 빈 것도 같다. 별리別離의 아픔은 사람 사이에만 있는 게 아닌가 보았다. 그림이 걸려있었던 벽면에는 허여스름하니 네모진 자국이 남아있다. 내 마음에도 그림 액자를 떼어낸 자리처럼 허여스름한 자국이 어룽져 있다.
   한 점 한 점 내게로 와서 함께했던 시간들이 더듬어진다. 전시장의 그림 앞에서 셈을 하고 또 궁리하고, 어쩔 수 없어 돌아섰던 아쉬운 발길. 어찌저찌 마련해서 그림을 들여오던 날, 어떻게 하면 그림이 돋보일 수 있을까를 궁리하며 거실 벽의 여기저기에 걸어보고 떼어보며 수없이 옮기며 수선을 떨었다. 자다가도 깨어 나와 어루만져 보던 일이 어제인가 싶기만 하다.
   해가 가면서 많은 이야기를 담은 그림들이 벽들을 차지했다. 실내장식의 하나로 여겼던 그림들이 집안 꾸미기를 벗어나 언젠가부터 내 안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일상이 고달플 때면 나도 모르게 그림 앞으로 갔다. 그림 속에서 나와 다른 삶의 풍광을 만나므로 자연의 섭리와 질서, 그리고 생명의 외경을 일깨우며 밝은 미소를 되찾을 수 있었다.
   겨우내 꽃봉오리로 머물다가 새봄을 맞아 피어나는 매화 동백을 바라보며 기다림과 인내를 배웠다. 흐르는 강을 따라 걸으며 흙과 바람 속에서 자라는 들꽃의 숨결을 느끼고 늪가의 풀벌레들을 보면서 모든 생명체에는 나름의 향기와 아름다움이 있음을 깨달았다. 중천에 뜬 보름달을 볼 때면 어릴 때 “내 더위 사가라.”고 더위를 팔던 일을 떠올리며 심란한 마음을 다독이기도 했다.
   어느 날은 그림 속 숲에서 사색에 잠기기도 했다. 겨울의 호젓함 속에 잔설을 머리에 이고 앉은 정자 마루에 누워서 이제 막 둥싯거리며 솟아오르는 해를 마주하며 겨울 맛에 취해보기도 했다. 만물에 순환이 있어 소진된 생명이 부활의 색으로 되살아나는 봄이면 자연의 시와 음악이 어우러져 나를 조요히 이끌기도 했다. 때로 한여름의 시원한 솔바람 속에서 산새들의 지저귐을 들으며 심신의 고단함을 다 부려버리기도 했다. 화폭마다 면면하게 흐르는 아름다운 자연과 생명의 노래가 있었으니 그림은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었다. 나에겐 삶을 지탱하는 힘이었다. 일상의 잔잔한 기쁨이었으며 인생살이의 참 스승이기도 했다.
   그림을 모으는 과정에 몇 가지 해프닝이 있었다. 판화 표구를 맡긴 화방에서 그림 아래쪽에 쓰인 작가의 사인을 잘라버려서 다시 사인을 받은 일이며, 위탁판매를 맡겼다가 떼이기도 한 어이없는 일도 있었다. 4호 그림을 원했는데 10호로 큰 그림이 내게로 와서 배달사고인가 하고 작가에게 물었더니 그대로 괜찮다는 말을 들려준 뜻밖의 좋은 일도 함께 있었다.
   많은 작품들이 있어도 유독 애정이 가는 그림이 있었으니, 내가 서른셋에 들여온 판화였다. 경복궁 앞 현대화랑에서 서양화가 김구림의 판화전이 있었다. 엽서 두 장쯤 될까 싶은 크기의 나무 한 그루, 다른 화면에는 두 그루의 나무가 이미지화 된 여섯 장의 시리즈였다. 단박에 마음이 끌렸다. 우선 자그마한 게 공간을 덜 차지해서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림 값이 내 정서의 키를 훨씬 넘는 바람에 몇 차례 들락거렸다. 가까스로 마감날에야 호랑이 등에 올라타는 기분으로 집으로 옮겨왔다.
   그 이전까지는 동양화에만 마음을 기울였다. 전주에서 살았던 사람은 기억할 것이다. 한옥이 대부분이었으니 사랑이나 안방 벽장 문에는 산수화나 화조도花鳥圖를 벽지처럼 벽에 붙였다. 웬만한 집에서는 서화書畫 두어 점씩을 붙이는 게 일상이었다. 어쩌면 그런 모습이 눈에 익어서였을 게다. 고서화나 민화에 치중했었다. 차츰 여학교 때 신문에 실린 삽화들을 스크랩했는데 그때 낯익힌 화가들의 작품을 찾아다니기도 했었다.
   살림에 도움 되는 것도 아닌 것을 현실에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수입이 있어야 했다. 바느질을 좋아해서 아이들 옷이나 내 옷을 만들어 입다보니 주변에서 부탁을 해왔다. 그 일이 실마리가 되어 낮이면 골방에서 유아복을 만들어 베이비센터에 보내곤 했다. 백화점이 성하면서 옷 만드는 일을 그만두게 되자 대신 오전에 할 수 있는 과외를 시작했다. 낮 시간에 했으니 특별히 식구들에게 알려질 일도 없었다.
   몇 해 전 병상에 있을 때였다. 내 손으로 살림을 못하게 되면서 도우미 비용이며 병원비 등이 만만치 않았다. 생각 끝에 인사동에 있는 화상畫商을 집으로 불렀다. 소장하고 있던 그림과 고가구며 골동품을 보여주었다. 갑자기 얼굴에 희색을 띠는가 싶더니 곧바로 평정심을 찾으면서 “요즘은 때가 지났습니다. 옛날에 한참 좋았지요.”라는 거였다. 사십여 년 전 유명화랑에서 구입한 가격의 절반만 얘기 했어도 빈손으로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장의 흐름에 따라 그림 값이 정해진다지만, 그 가치의 기준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달라진다는 게 참으로 서글펐다. 내가 그림을 고르는 기준은 꼭 유명작가의 대표작이 아니었다. 화랑에서 잠시 보고 마는 게 아니고 언제 어느 때라도 집에서 즐길 수 있는 그림이면 되었다. 미술관에 가서 보면 될 것 아니냐고 말할 수 있지만 그림은 소유일 뿐 공유할 수 있는 게 아닐터였다.
   나중에 큰돈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랬던 내가 그 화상畫商이 다녀간 뒤로 한동안 마음을 뒤숭숭해했다. 땅 한 뙈기씩이라도 사모을 것을 그랬나? 아니면 은행에 얌전히 두기만 했어도 좋았을 걸? 나 스스로에 대한 자문, 자책, 자괴지심 등으로 휘청거린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다산茶山의 글 한 대목이 생각났다. 논을 넓혀 연을 심은 사람과 연 심은 못을 돋워 논으로 만든 사람 이야기다. “연밭을 헐어 논밭을 일구면 거둘 곡식이야 늘어나겠지만, 몇 포기 더 심어 얻은 쌀보다 연꽃을 심어 감상하는 정신적 여유가 더 소중하니라.” 작은 이익과 삶의 정취를 맞바꾸지 말라는 뜻이렷다. 새삼스레 그 귀한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잠시나마 휘청거렸던 지난 며칠을 후회했다. 그 후 그 화상이 여러 차례 내게 전화를 했지만 나는 연락을 끊었다.
   우두커니 텅 빈 벽을 바라본다. 이젠 그 그림들이 아이들에게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