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랬다. 흙은 죽지 않는다. 어떤 고난 속에서도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끝없이 자신을 정화시킨다. 비록 한 줌 작은 대지가 됐을지라도. 맑은 물 흐르는 수돗가에 나는 이 작은 대지를 옮겨 놓아야 했다."
작은 대지 - 서이정
주중에 한 번 모이는 방이 있다. 여기에서 나와 내 친구들 몇은 차를 마시며 이야기꽃을 피운다. 어떻게 하면 보다 아름다운 말꽃을 피울 수 있을까? 그러고 보면 우리에게 이 방은 꿈을 꿈꾸는 즐거운 고뇌의 공간인 셈이다.
출입구 안쪽에 조리용 간이 탁자가 있고 그 위에 커피포트와 차를 만드는데 필요한 도구들이 얹혀있다. 커피도 타고 설록이나 우엉을 차로 우리면서 웃음을 나누는 자리다. 그 아래 바닥에 흙이 낡아버린 그릇이 하나 방치된 채 제법 긴 세월을 먹고 있다. 우리는 마시다 남은 커피나 녹차 사이다 콜라, 심지어는 잔을 데우거나 헹군 뜨거운 물도 그 그릇에 부어버린다. 우엉이나 녹차 따위 찌꺼기까지.
아! 나는 남긴 찻물을 버릇된 대로 낡아버린 흙에 부으려다 허공으로 눈을 돌렸다. 세에~상에….
화려한 꽃, 군자란이 있었다. 봄바람에 나부끼는 숙녀의 연분홍 옷고름 같은 리본이 차롬했다. 그는 책상 위 높은 자리에 앉아서 찬란한 태를 뽐냈다. 여러 사람의 찬탄과 사랑을 받으면서. 하지만 그는 한 생애를 자랑차게 보냈을 뿐, 그 다음을 버린 것 같았다. 다시 피어나고자 하는 희망을 일구지 못했다. 꽃을 피우며 청춘을 뽐내게 했던 흙마저도 그 그릇에 담긴 죄로 저 아래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후에도 시나브로 밀려나가서 열린 문을 받치는 버팀돌로, 찌꺼기를 먹는 개숫물받이로, 서럽게 살았다. 슬픈 일이지만 인간들은 대지를 사랑하지 않는다. 대지가 가꾸는 꽃을 탐할 뿐이다.
이 몇 년 사이, 우리에게 그는 황무지보다 더한 망각의 땅이었다. 이 작은 땅에서 다시 푸른 생명이 봄바람을 날리리라는, 우리들 중엔 그 누구도, 그런 희망을 꿈꾸지 못했다. 명색이 ‘말꽃’을 피우기 위해 이 방에 모여 바람을 마신다면서. 이 작은 대지가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에 그쳤는가? 그가 오랫동안 쉼 없이 새 생명을 틔우기 위해 애를 썼으련만, 천지 분간도 못하는 인간들이 그저 나태와 오염을 퍼부었을 뿐이다. 그런 곤욕과 굴욕을 겪으면서도 작은 대지는 모국의 이슬들이 소곤거리는 꿈을 꾸었나 보다.
그는 처음 어머니 땅에서 떨어져서 저만의 작은 대지가 되었으리라. 어떤 인간이 거친 삽으로 옴싹 떠서 구름무늬 고운 햅쌀 같은 그릇에 담고 군자란 한 그루를 앉히고, 대지와는 천만 리 머나먼 공중에 지어진 이 삭막한 쇠돌이네 집으로 쫓아 보냈으리라. 그날부터 그는 자기 혼자 안으로 안으로만 사랑해야 하는 작은 대지가 된 셈이다. 그나마 꽃 한 송이 피울 수 있어서 덜 외로웠을까. 꽃이 지자 인간들은 꿈에서조차 거들떠보지 않았다. 하기야 아무것도 키워내지 못하는 흙을 누가 대지라 하랴만. 버려지는 곤욕을 셀 수 없이 겪으면서도 그는 어머니의 대지가 지닌 본성을 잃지 않았던가. 오늘 이렇게 한줄기 생명을 세우고 그 정수리에 앙증맞도록 작은 꽃 한 송이 올린 걸 보면…….
안개꽃인가? 아니다. 파르스름 옥색이 곱다. 고사리손보다 작은 잎이 도로롱 도로롱 꽃을 우두었다. 녹두 순보다 더 여린 대공이 한없이 가늘어서 슬프다. 하늘로 하늘로 흔들리고 있다. 대지의 물을 머금고 별빛을 품었는가. 해내음이 풍겨나고 달빛도 고여 있다. 수억 광년 건너, 저어기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이름 없는 꽃이 아니라 내가 이름을 몰라서 더 애달픈 꽃, 얼굴을 마주한 꽃이 웃는다. 나는 하릴없이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하마터면 그 정수리에 죽음의 오수를 끼얹을 뻔했다.
그랬다. 흙은 죽지 않는다. 어떤 고난 속에서도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끝없이 자신을 정화시킨다. 비록 한 줌 작은 대지가 됐을지라도.
맑은 물 흐르는 수돗가에 나는 이 작은 대지를 옮겨 놓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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