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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수필과비평 2018년 08월호, 통권202호 I 사색의 창] 바람의 길목 - 진해자

신아미디어 2018. 10. 29. 14:03

바람 부는 오름에 섰다. 바람이 멈추지 않는 오름의 길목이 아름답다. 나무 하나 없는 오름에 의지할 것 없이 꺾이고 부러지며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작은 풀이 대견하다. 여리고 작은 풀도 거센 바람을 견뎌낸다. 바람이 아무리 거칠고 힘들어도 언젠가는 훈풍이 불어오겠지. 나는 오늘도 따뜻한 봄날의 바람을 기다리며 그 길목에 서 있다."







   바람의 길목    -    진해자


   용눈이오름을 올랐다. 나무 한 그루 없는 오름의 바람은 모든 것을 날려 버릴 듯이 불어온다. 정상에서 매섭게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서 있다. 능선과 능선 사이를 쉼 없이 넘나들며 바람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정상에서 바라보면 마을이 있고 점점이 집이 보인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아픔과 사연을 안고 사람들은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간다. 바람은 마을과 집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보이지 않는 마음속 응어리를 끄집어낸다. 지독한 그리움을 저 세상 누군가에게 전할 수 있는 것이 바람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따라가고 싶다. 
   떠나간 이와 남겨진 이를 연결해주는 전화가 있다. 일본 이와테현 가마이시시에서 멀지 않은 곳에 검은색 전화가 한 대 놓여있다. 사람들은 이 전화기를 ‘바람의 전화’라 부른다. 가족과 친구,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린 후, 상심에 빠진 사람은 이곳을 찾아와 천국의 번호를 소리 없이 누른다. 하고 싶은 마음속 이야기는 전화기 저편에서 대답 없는 메아리가 된다. 메아리는 바람을 타고 멀리 퍼져 간다.
   가슴속에 쌓이고 쌓인 응어리를 바람을 통해 보내야 한다는 사실은 슬픈 일이다. 사람들은 아픔이나 슬픔은 잘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속으로만 꼭꼭 숨기다가 더 큰 아픔이 되고 상처가 된다. 하지만 바람의 전화처럼 응어리를 풀어내고, 그 응어리를 바람을 통해 날려 보낼 수 있다는 건 아픈 곳이 곪지 않게 약을 바르고 치료하는 효과를 가진다.
   한 평도 안 되는 공간의 전화 부스에 들어가 전화기를 들고 언덕 저편에 있는 그리운 이와 통화를 한다. 그 내용을 전할 수 있는 것은 바람뿐이다. 바람은 형체가 없다. 그러기에 어디든 갈 수 있다. ‘바람의 전화’를 이용해본 사람은 통화 내용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나에게도 이런 전화기가 있으면 좋겠다. 가족이나 친한 친구에게도 다 풀어내지 못하는 응어리를 마음껏 풀어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 맺힌 목소리가 바람에 실려 하늘 끝까지 전해지면 그 바람은 다시 메아리가 되어 나에게로 돌아오겠지.
   제주에는 어디서나 지독한 바람이 분다. 360여 개 오름 중에서 내가 자주 오르는 용눈이오름은 오늘도 바람이 거세다. 저 바람을 바라보며 사라져간 사람을 생각해 본다. 바람과 함께 사라져간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사진가 김영갑은 쉼 없이 부는 바람을 한 장의 영상으로 남기기 위해 몸부림치다 바람과 함께 사라져 갔다.
   정녕 바람과 함께 사라진 것은 무엇이고 남은 것은 무엇일까. 육체는 다하여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지만, 영혼은 우리 기억에 남아있다. 예술가의 육체는 사라지고 없지만, 작품에 대한 열정과 정신은 늘 살아 숨 쉰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과의 영원한 이별을 너무 슬퍼하지 말자. 지금 내 곁에 없다 하여 없는 것이 아니다. 마음속에 같이했던 시간과 추억은 오롯이 살아 숨 쉬고 있다.
   나는 언제나 바람의 길목에 서 있었다. 멈출 듯하면서 다시 불어오는 지독한 바람이 정신없이 몰아쳐 올 때는 손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간혹 바람은 인생의 운명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 힘으로 도저히 견뎌낼 수 없는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면, 인생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태풍같이 몰려오는 바람도 운명으로 받아들이니 어느 순간 내 몸 안에서 고요해진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바람은 언젠가 잦아든다. 바람 소리에 집중하며 외롭다는 생각과 슬픈 감정을 조금씩 덜어낸다. 바람의 길목에 서서 어지럽고 부질없는 잡념을 날려버린다.
   힘들고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중년의 나이를 맞았다. 많은 사람이 순간에 몰아치는 바람을 이겨내지 못하고 휩쓸려 가버리거나 사라져 버리지 않았던가. 나 역시 바람을 맞고 서 있던 시간이 있다. 텅 빈 들판에는 오직 바람과 나뿐이었다. 아프고 힘든 현실에 때로는 좌절도 하고 원망도 했다. 세상의 모든 아픔을 혼자 짊어진 것처럼 쉬지 않고 걸어가도 돌아보면 또 그 자리였다. 하지만 시간은 계속 흐르고 거칠게 불던 바람도 어느 순간 고요해지더니 시나브로 아픈 자리가 아물어 간다. 
   바람에 마음을 맡기고 새봄이 오기를 기다린다. 아무리 춥고 황량한 바람이 불어대는 겨울도 봄이 오면 사라질 것이고 새 생명이 움튼다. 아픔이 크고 상처가 남아도 마음을 헤집고 흔들던 바람은 기어이 지나간다. 흐드러지게 핀 꽃잎이 다 떨어져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피어오르듯이, 남은 인생에 어떤 만남과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가버린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지나간 날은 과거로 묻어두자. 바람에 몸을 맡겨 자유로이 떠돌다가 어느 길목에서 나를 흔들고 지나갔던 인연을 만나거든 그때 다시 꽃을 피우자. 바람은 다정한 벗이었고, 동시에 나를 할퀴던 무서운 적이었다. 바람은 좋은 것만 내주지는 않는다. 순하게 불다가도 어느 순간 사정없이 휘몰아치면 마음과 정신이 혼미해진다. 하지만 잔잔한 바다에서는 유능한 뱃사공이 나오지 않는다. 매서운 바람이 있었기에 흔들리면서도 다시 일어서는 용기를 얻었고 내면에 더 튼튼하게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바람 부는 오름에 섰다. 바람이 멈추지 않는 오름의 길목이 아름답다. 나무 하나 없는 오름에 의지할 것 없이 꺾이고 부러지며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작은 풀이 대견하다. 여리고 작은 풀도 거센 바람을 견뎌낸다. 바람이 아무리 거칠고 힘들어도 언젠가는 훈풍이 불어오겠지. 나는 오늘도 따뜻한 봄날의 바람을 기다리며 그 길목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