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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수필과비평 2018년 08월호, 통권202호 I 사색의 창] 산귀래별서 단상山歸來別墅 - 이동이

신아미디어 2018. 10. 28. 18:52

남은 날들에 향기 한 줌 얹으며 순간을 저장했다. 야생화의 내밀한 속삭임에 귀 기울이고 복받치는 감정을 독백처럼 읊조렸다. 문학이란 씨앗 한 톨로 이루어 낸 수필공원에서 한마음으로 <스승의 노래>를 합창했다. 사랑으로 충만한 목소리가 숭고한 아름다움과 고결한 예술혼이 녹아있는 산귀래별서에 울려 퍼졌다."







   산귀래별서 단상山歸來別墅    -    이동이


   지난밤부터 줄기차게 내리던 비는 다음날 아침이 되어도 그치질 않는다. 오후에 있을 행사에 차질이 생길까 우려된다. 어차피 내릴 양이면 오전 내 잔뜩 내리고 스승의 문학비 제막식 전에는 쾌청했으면 좋겠다.
   이른 시간 배웅에 나선 분의 우산 속에서 느긋이 버스에 오르는 스승의 모습은 마치 무성영화의 한 장면 같다. 엷은 미소만 지을 뿐 엄숙하다. 딱히 말하지 않아도 무언으로 통하는 눈빛, 그 은은함이 따스하다.
   좀처럼 멈추지 않을 것 같던 비는 먼 길 따라오다 지쳤는지 내 주문이 먹혔는지 어느 틈에 꼬리를 감추었다. 양쪽으로 서서 길을 열어주는 벚나무와 느티나무가 비 그친 뒤라 더욱 싱그럽다. 모처럼의 봄나들이에 기분이 고조된 탓일까. 장장 네 시간의 지루함도 잊는다. 양평으로 가는 길은 멀었다. 목왕리 골짜기는 그보다 더 멀고 깊었다. 구불구불 이어진 길은 산으로 깊숙이 흘러갔다. 


   정갈한 숲에서 내뿜는 냄새는 향기롭고 달았다. 흐르는 냇물조차 정겹다. 황순원 소설 <소나기>의 배경이 된 곳을 스치듯 지나가자 바지를 걷은 채 소녀를 업고 내를 건너던 소년의 달뜬 미소가 떠올라 저절로 얼굴이 붉어진다. 이 나이에 가슴이 뛴다면 심장병이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를 들었지만 그들의 순진무구함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치 않는가보다. 골짜기에서 피어오른 물안개는 능선을 타고 온 산으로 번져간다.

   산귀래별서로 오르는 길은 야생화 꽃길이다. 선뜻 부는 바람결에도 향기가 묻어났다. ‘산귀래’는 망개떡에 사용되는 청미래덩굴의 옛말로 산으로 돌아간다는 뜻이고, ‘별서’는 별장을 겸한 농막의 옛 이름이다. 이름이 가진 의미대로 자연의 품을 온전히 내준다. 둔덕마다 알록달록한 꽃들의 향연이 펼쳐지고 초록생명들도 자리 잡는다. 잔디의 폭신한 질감과 풀의 기운들이 발끝으로 전해오자 온몸에 푸른 물이 돋는다. 나 역시 한 가닥 풀잎이다.
   복사꽃은 저 홀로 농염하고 조팝나무는 순백의 옷을 걸쳤다. 봄비에 불쑥 자란 풀은 꽃나무 밑을 치받으며 오른다. 양귀비와 달맞이꽃이 이웃해 있고, 적당한 곳에 질펀하게 앉은 비비추와 호스타가 멋스럽다. 금낭화와 초롱꽃은 무리지어 있을 때 더 생기가 난다. 아직 꽃 피우지 못한 야생화가 조바심을 치는지 땅심이 느껴진다. 저마다의 소리 없는 몸짓에서 역동성을 본다.   


   들머리에서 보았던 은발에 분홍색 롱드레스를 입은 분이 환한 미소로 반겨 준다. 단아하고 고운 모습에서 들꽃과 함께한 세월을 읽는다. 그분은 오래전부터 농원을 운영하며 그 수익금으로 문학상과 문학비를 세웠고, 수필문학인들의 자존을 높이는 일에 열정을 쏟은 박수주 여사이다. 일 년 중 봄에 행하는 이 행사는 올해 11회를 맞이했고, 세 번째 문학비의 주인공은 J스승이 되셨다. 삶의 의미와 가치를 수필문학 정진에 두고 몸소 실현하고 있는 그분의 고결한 정신은 현재 진행형이다.


   문학상 시상식과 시낭송에 이어 양지바르고 편편한 곳에서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수필 <아름다운 배경>의 한 부분이 스승의 문학비에 새겨져 있다.


   내 삶의 배경이/ 아름다워지길 원한다면/ 먼저 이웃의 삶에/ 아름다운 배경이 돼야 할 것이다./ 나는 어느 누구를 위해서/ 아름다운 배경이 돼보았는가.

   정신을 일깨우는 문장에 숙연해졌다. 돌아보면 자신에 대한 성찰보다 원망이 더 깊었다. 평소 내 생활의 원칙을 흔드는 소리에 혼란스러웠고, 착잡한 심정에 말문이 막힌 적이 있다. 누군가에게 아름다운 배경이 되고자 했는데 아니었던 것이다. 배려와 베풂이 능사가 아니었다. 상대의 정확한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혼자만의 착각이었을 시간들이 못내 서럽고, 녹록지 않은 인간관계에 회한이 일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리석은 자신을 깨치는 소리인 양 구절구절이 가슴에 파고들었다.
   새소리에 이끌려 잔디마당으로 나섰다. 전국에서 참여한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손 맞잡고 미소를 주고 받다보니 모두가 하나인 공동체로 어우러졌다. 직접 가꾼 나물로 차린 푸짐한 시골 밥상은 서로를 끈끈하게 이어주는 또 다른 사랑이었다. 사람이나 식물이나 생존의 방식은 별반 다르지 않다. 서로의 기척으로 살아있음을 느끼고 부대낌 속에서 한 단계 더 성숙되고 발전해 가는 것이다.
   남은 날들에 향기 한 줌 얹으며 순간을 저장했다. 야생화의 내밀한 속삭임에 귀 기울이고 복받치는 감정을 독백처럼 읊조렸다. 문학이란 씨앗 한 톨로 이루어 낸 수필공원에서 한마음으로 <스승의 노래>를 합창했다. 사랑으로 충만한 목소리가 숭고한 아름다움과 고결한 예술혼이 녹아있는 산귀래별서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