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의 죽음을 계기로 세상을 돌아보니 어쩌면 한 사람의 생애는 무수히 많은 사람과의 시절 인연으로 점철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인연을 허투루 넘겨서는 안 될 이유다."
시절 인연 - 이혜연
글 선배의 부음 소식을 들었다. 그분과 함께했던 시간들이 머릿속을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 시간들이 이제 한 시절이 되고 말았다. 누구와 함께했던 시간은 길고 짧음에 상관없이 그 사람이 사라짐으로써 어느 한 시절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렇게 선배는 내게 시절 인연을 남기고 흔적 없이 사라졌다.
“살면서 우리는 몇 명의 사람을 만날까?”
영화 <My own love song>에서 여주인공 제인 와이어트가 부른 노래 중 한 구절이다.
제인 와이어트는 잘나가던 가수였다. 그러나 지금은 하반신 마비로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는 불구자다. 교통사고로 남편은 그 자리에서 죽고 그녀는 혼수상태 끝에 깨어났지만, 하반신 마비라는 끔찍한 현실에 충격을 받아 정신과 치료를 받게 된다. 자식을 양육할 수 없는 상태라는 관계 기관의 판단으로 그녀의 3살배기 아들 데번은 위탁 가정에 맡겨진다. 잃어버린 것들이 너무 아파 세상과 담을 쌓은 그녀. 노래와도 인연을 끊었다. 그런 그녀의 곁을 흑인 남자 조이 나빈스키가 따듯이 지켜준다. 하지만 그 역시 상처를 안고 있다. 화재로 가족을 모두 잃고 천사에 대한 망상에 빠져 있던 그는 정신병원에서 그녀를 만났고 그 인연으로 그녀 곁을 지켜주게 된다.
어느 날, 열 살이 된 아들 데번이 제인에게 편지를 보낸다. 초대장이다. 영성체를 받는 날 와주기를 바라는 데번의 간절함은 ‘제인, 아니면 엄마 제인에게’라는 말머리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우연히 그 편지를 발견하게 된 조이. 그러나 편지는 미개봉인 채로다. 내용을 읽은 그는 그 사실을 비밀로 한 채 그녀를 아들에게 데려다주기로 마음먹고 그녀와 함께 여행길에 오른다.
길 위에서 좋은 인연 나쁜 인연들을 만나고 때론 동행도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열리지 않는다. 우여곡절 끝에 만난 밴드 기타리스트가 마침 사정이 생겨 공연을 하지 못하게 된 동료 가수를 대신해 노래해줄 것을 부탁하지만 그녀는 거절한다. 하지만 공원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하고 있는 노부부 짐과 캐럴을 만나면서 그녀의 마음이 움직인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아내 캐럴이 사람들과, 이 세상과 작별 인사를 할 수 있도록 걸어서 여행을 하고 있다는 남편 짐의 말을 들으며 그녀는 깨닫는다. 내가 이 세상의 주인임을, 내가 살고 있는 동안 이 땅의 모든 것들 -끝없이 펼쳐진 하늘, 황금빛 계곡, 출렁이는 밀밭, 삼나무 숲에서 사막에 이르기까지 이 대지 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걸, 내가 존재함으로써 그 모든 것들이 비로소 존재한다는 걸…. 그러니 살아있는 동안 이 모든 것들을 충분히 누리고 인연을 소중히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노래한다.
여정의 끝, 마침내 그녀는 아들 데번을 만나 그에게 <My own love song>을 헌사하며 손을 내민다. 도움을 준 이웃, 조이의 손을 꼭 잡으며 환히 웃는 그녀에게 조이가 독백하듯 말한다.
“천사와 마법은 중요하지 않아. 나누면서 사는 거야.”
‘철없는 나팔꽃’이라는 별칭답게 선배는 유쾌하게 세상을 즐기고 갔다. 그라고 왜 힘든 시절이 없었겠는가? 그럴 때마다 그는 주인 의식을 가지고 당당하게 세상과 맞장을 뜨고 생각의 전환으로 고비를 넘겼을 것이다. 영화 속 제인처럼 피폐한 정신, 쇠잔해진 육신으로 세상을 부정만하고 있던 내게 선배는 특유의 쾌활함으로 가볍게 세상을 지나는 법을, 세상을 사랑하는 법을 보여주었다. 그가 떠나면서 그의 시간도 그의 세상도 그와 함께 사라졌다. 하지만 선배는 내 삶에 그의 한 시절을 나누어주고 갔다.
“세상에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마음대로 되는 일도 없다. 인간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외롭지 않다. 살면서 우리는 몇 명의 사람을 만날까. 이웃이 있는데 굳이 다른 것을 믿을 필요가 있을까.”
허스키한 그녀의 목소리가 가슴 깊숙이 파고든다.
선배의 죽음을 계기로 세상을 돌아보니 어쩌면 한 사람의 생애는 무수히 많은 사람과의 시절 인연으로 점철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인연을 허투루 넘겨서는 안 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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