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은 사랑의 동반자다. 사랑이 있어 눈 내리는 겨울이 춥지 않다."
하얀 숲속의 향연 - 오승휴
온 세상이 새하얗다. 눈 덮인 숲길이 장관이다. 늦은 아침, 눈길을 걷는다. 추운 겨울인데도 마음은 연인의 품에 안긴 듯 포근하고 따뜻하다. 차가운 눈이 온기를 느끼게 하다니! 꿈속에 살포시 잠기듯이 속세의 모든 근심 걱정이 눈 속에 다 잠겨 버렸는가.
눈 쌓인 숲에 나무가 울창하다. 눈길 저만치서 놀고 있는 노루 한 쌍이 보일 뿐, 평소와 달리 산책객은 안 보인다. 눈이 수북이 쌓인 숲길에 내가 오늘 첫 손님인가 보다. 하얀 숲속의 고요가 나를 감싸 안는다. 날아갈 것 같은 이 기분, 온 세상이 내 것인 듯 흐뭇하고 유쾌하다.
하얀 옷을 입은 아름드리 소나무와 동백나무, 먼나무와 편백나무들이 눈길을 붙잡는다. 상록수 나뭇가지마다 백설의 눈꽃이 화려하게 피었다. 무척이나 평화롭고 아름답다. 한들한들 내리는 눈발에 새들도 ‘짹짹’ 노래하며 장단 맞춰 환호한다. 겨울 숲속에 백설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다.
숲은 설경의 무대요, 새들은 연주자다. 이 숲에 푸르른 나무가 없다면, 숲에 새들이 없다면 삭막하고 외롭기 그지없으리라. 보금자리를 제공하고 기둥이 되어주는 나무와 즐거움을 노래하는 새들은 사랑의 한가족이요, 생의 동반자다. 눈 잔치 벌이던 옛 추억이 함박눈에 휘날리며 내려온다.
그 시절, 고향마을에는 겨울이면 눈이 많이 왔다. 앞마당에 무릎이 잠길 만큼 눈이 쌓이는 게 몇 번이었던가. 온 가족이 동원되어 눈을 치우며 올레 길을 내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집안 가장家長은 홀로 계신 어머니셨다. 우선 마당 한구석에 장작불을 피운다. 잔심부름은 늦둥이인 어린 나의 몫이다. 불화로에 장작 불씨를 옮겨 놓는다. 설한풍이 불어도, 어깨가 쑤시고 힘들어도 누나들은 삽질을 하고 대빗자루를 쓸며 눈 치우기 작업을 신나게 한다. 화롯불에 모여앉아 맛있는 음식 먹으며 정 나눌 차례가 기다리고 있어서다.
어머니의 음식솜씨는 으뜸이었다. 집안이 어려워도 미리미리 음식 재료 마련에 정성을 쏟아온 당신, 식솔이 여럿이니 준비하는 손이 얼마나 바쁠까. 그 거친 손은 화롯불처럼 추위를 녹이는 손이다. 정성 어린 손맛이 녹아 있는 국밥은 보기만 해도 침이 꿀꺽 넘어간다. 뚝배기에 콩나물을 넣고 육수를 부어 푹 끓인 국밥은 걸쭉하고 텁텁한 맛이 난다. “눈이 많이 오면 농사풍년이 든다.”는 어머니의 말씀은 밥상의 반찬이다. 찬바람 불고 함박눈 휘날려도, 식사시간엔 웃음꽃이 그칠 줄을 모른다. 눈 내린 날의 우리 집 가족잔치였다.
지나친 식탐食貪으로 배탈이 나면, 어머니는 나의 배를 당신 손으로 살살 문지른다. 따뜻한 그 손은 신통한 약손이다. 뱃속에서 나던 ‘꼬르륵’ 소리가 멈춘다. 그러면 어린 나를 당신 품속에 꼭 껴안는다. 언제 탈이 났었냐는 듯 아픔이 사라진다. 누나들은 “배 아프다는 건 거짓말이야!” 하며 나를 놀려댄다. 숲길에 하얀 눈이 쌓이듯 우리 가족의 사랑과 정은 이렇게 깊어갔다.
한데 세상일이란 예측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나의 학생시절, 어머니는 한 많은 세상을 뜨시고 말았다. 홀연히 고아가 되어버린 여동생과 나는 눈앞이 캄캄해 왔다. 그때 선뜻 나서서 우리를 떠맡아 준 게 시집간 누나였다. 가난에 쪼들리던 시절이었으니, 짓누르는 삶의 무게가 얼마였으리. 친정식구까지 떠맡은 시집살이였음에도, 포기할 수 없다며 생명의 끈 부여잡고 견딘 누나의 인내와 끈기! 그 삶의 원동력은 혈육에 대한 정과 사랑이 아니었을까.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다.”는 말이 있다. 가족은 짐만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기쁨에는 걱정과 고통도 따른다는 의미일 것이다. 인생길을 가는 데에 큰 힘을 실어주는 원천은 사랑이라 했다. 가족의 사랑에서 삶의 원동력이 솟아나온다는 걸 나는 믿는다. 모진 시련과 풍파에도 가슴속에 사랑의 불을 타오르게 만드는 게 가족이다. 고통과 외로움, 기쁨과 즐거움을 함께 나눌 가족이 그 당시 내 곁에 없었다면 과연 나는 어떻게 됐을지….
사색에 잠긴 채 눈길을 걷노라니 수목원에 있는 산림욕장이다. 여기도 눈이 많이 덮여있지만, 사방이 큰 나무들로 둘러싸여 포근하다. 찾아온 산책객을 환영하는 새소리가 왁자하다. 나무 사이로 파란 하늘이 열려있다. 창공에서 ‘이곳에서 즐겨라.’는 듯 내리쬐는 겨울햇살이 눈부시게 반짝거린다. 쌓인 눈을 걷어내고 벤치 위에 걸터앉았다.
새들도 따스한 햇살이 좋은지 참새와 직박구리, 비둘기와 까치 등 숲속 새들이 몇씩 짝지어 짹짹 노래하며 이리저리 날아다닌다. 하얀 눈 위로 사랑이 뜨겁게 물들고 있다. 나 보란 듯 재잘대는 새들이여! 연인끼리 사랑을 나누는 건지, 주연은 누구인지 도저히 분간할 수가 없구나. 하얀 숲속 가족들의 공연을 어찌 찬탄치 않을 수 있으랴.
집에 오자 아내가 뜨개질을 하다 말고 반긴다. 설 명절 때 서울 손녀가 고향에 오면 줄 선물이라며 목도리를 짜는 중이란다. 손녀는 새봄에 초등학교에 입학할 예정이다. 어린애처럼 내가 빙긋이 웃으며 뜨개질하는 아내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이 따뜻하다.
가족은 사랑의 동반자다. 사랑이 있어 눈 내리는 겨울이 춥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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