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에서 뛰어다니는 말을 상상한다. 말은 여유가 있고 다정하다. 말은 나긋나긋하고 윤기가 흐른다. 여태껏 선뜻 내게로 다가오지 않은 말이다. 내가 한 번도 뱉어내 본 적 없는 말이기도 하다. 귓가로 다가와 따뜻한 숨결로 속삭이는 말의 갈기를 가만히 쓰다듬어 본다. 숨쉬기가 한결 수월하다. 겨울을 지내는 동안 말言의 고삐를 단단히 잡고 사막을 건너 새봄을 맞이하고 싶다."
사막을 건너다 - 우미정
온 말言이 입안에서 서걱거린다. 가볍고 대부분 쉽게 부스러진다. 말은 내 귓가에서 뛰어다니다 뿔뿔이 흩어진다. 흩어졌다가 띄엄띄엄 다시 생각난다. 그래도 가볍기는 마찬가지다. 가벼워서 오래 머물러 있지 못한다. 오는 말이 그러하고 가는 말 또한 그러하다.
밤에 눈을 감아도 하루의 말 중에서 나를 다시 찾아와 안기는 말은 그다지 없다. 밖은 한겨울 속으로 들어서느라 바람이 거세지는데 따뜻한 말을 품지 못한 나에게 바람 소리는 더 매섭게 파고든다. 뒤척이며 보내는 밤은 유난히도 길고 적막하다.
말은 수시로 모래가 된다. 말이 있는 곳에 끼어들면 금방 사막이 생겨난다. 사람들은 말을 주고받으며 사막을 만드는 신통방통한 재주가 있는 것 같다. 사람들 입에서 쉼 없이 모래가 빠져나온다. 모래는 금방 쌓인다. 장딴지로 허벅지로 허리를 지나 심장 근처까지. 나는 곧 답답해지고 숨을 쉬기가 불편하다. 사람들은 아랑곳없이 모래를 자꾸 뱉어낸다. 자신만의 사막을 만드는 일에 열중한다. 아주 근사한 사막을 만들었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사람들은 또 손뼉을 친다. 그러는 중에도 모래는 계속 쏟아진다.
나만의 사막을 만들고 싶다. 진즉부터 그랬다. 내 주변으로 모래를 쌓아 올릴 재주가 없었을 뿐 사막을 만들어야 할 이유는 백 가지가 넘는다. 헤어스타일이 자연스러워서, 예쁜 운동화를 신어서, 화장법을 바꾸어서, 하늘이 높아서, 바다가 출렁여서, 손이 차가워서, 미처 모르는 그곳에 가고 싶어서 등등.
사막을 건너는 상인들은 그가 지나간 곳을 다시 찾아오려고 어미 낙타가 보는 앞에서 새끼를 죽여 일정한 장소에 묻어둔다고 한다. 시간이 흘러서 다시 근방을 지날 때 어미는 새끼가 묻힌 곳을 정확히 찾아낸다. 수시로 꿀꺽 삼켜 버렸거나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던 내 말의 새끼를 나도 생활 반경 곳곳에 묻어둘까 싶다. 그곳은 입맛을 돋우어준 식당이거나 분위기 있는 커피숍이기도 하다. 손을 잡고 영화를 보던 영화관이거나 땀을 흘리던 운동장일 수도 있다. 다시 그곳을 찾을 때는 지금보다 재치 있는 말을 하고 싶고 능숙한 말솜씨로 동행과 어울리고 싶다.
말 때문에 나라가 들썩거렸다. 기세등등한 엄마의 말만 믿고 독일까지 가서 말[馬]을 타던 소녀는 초조한 시간을 보내다가 어쩔 수 없이 돌아왔다. 소녀가 타던 말과 얽힌 사람들이 뱉어내는 말은 한동안 뉴스 화면을 크게 장식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말은 또 다른 말의 새끼를 낳았다. 말이 많아질수록 말과 고삐를 이은 사람들도 덩달아 늘어났다.
나랏일을 맡았던 윗사람들이 말의 사슬에 묶이고 큰 기업을 감당하던 어느 분도 자유롭지 못한 처지가 되었다. 수척한 모습으로 포승줄에 묶여 재판에 나오는 장면을 볼 때마다, 초원을 달리지 못하고 묶여 지내는 말의 모습이 떠오르곤 했다. 말이 달리지 않는 초원은 사막과 별반 다르지 않다. 서로에게 탓을 떠넘기는 말을 들으며 말문이 막힌다는 듯 사람들은 그저 혀만 끌끌 찼다.
말에서 점점 멀어진다. 누가 떠미는 것도 아니다. 나만의 사막을 만들 여유가 지금은 없어서라고 다독인다. 익숙한 일이다. 익숙한 것에서 나는 또 위로를 받는다. 익숙한 것에 나를 다시 구겨 넣는 것에도 나는 능숙하다. 이런 나를 스스로 답답해하기도 한다. 어쩔 수 없다고 고개를 저으며 다시 멀어진다. 나는 그렇게 저절로 멀어지고 있다. 멀어지는 것이 내가 쌓아 올리는 쓸쓸한 사막이다.
사막과 말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 말과 모래도 어울리지 않는다.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서로 모여서 말의 사막을 만든다. 나의 주변이 특히 그렇다. 날마다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생겨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저만치 물러난다.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못한 말은 서걱거리는 모래로 쌓인다. 이런 사정으로 사막은 점점 넓어진다.
사막에서 뛰어다니는 말을 상상한다. 말은 여유가 있고 다정하다. 말은 나긋나긋하고 윤기가 흐른다. 여태껏 선뜻 내게로 다가오지 않은 말이다. 내가 한 번도 뱉어내 본 적 없는 말이기도 하다. 귓가로 다가와 따뜻한 숨결로 속삭이는 말의 갈기를 가만히 쓰다듬어 본다. 숨쉬기가 한결 수월하다.
겨울을 지내는 동안 말言의 고삐를 단단히 잡고 사막을 건너 새봄을 맞이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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